※ 은혼을 중심으로 한 잡다한 이야기가 될듯.

 

 

길고 긴 연휴를 맞아서, 헌터를 복습하고 남은 시간에 그간 못봤던 은혼 애니를 좀 봤다.

그리고 지금 쓰려는 글은, 언젠가는 쓰려던 것이었다.

 

원래 받아둔 애니를 다 보고 정리하려 했지만, 보지 않았어도 내용은 대강 알고 있을 뿐더러 도저히 봐지지가 않고, 속만 시끄러워서 결국 그냥 쓴다. 아마 나중에 다 보게 되면 뒤에 이어질 내용은 수정해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현재가 중요하니까. 나중이 어떻게 되든 현시점에서의 감상이면 충분하단 생각.

 

+ 솔직히 지금의 감상이 더 발전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소라치가 발전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1. 내가 은혼을 더 이상 보기 힘든 이유

 

은혼에 대한 흥미를 상실한 것은 14년도엔가 네타에서 긴이 쇼요를 죽였다는 내용이 나오면서부터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일이 소개되며 긴토키가 타카스기한테 입만 번지르르하게 지껄이던, 어이없던 그 말들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쇼요가 긴토키에게 가르쳤다는 내용이며, 소라치가 생각하는 은혼의 중심이며, 긴토키라는 캐릭터의 중심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뒤를 더 봐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달까.

 

내가 은혼을 볼 수 없는 이유.

그것은 은혼이 "성장하지 않는 소년만화"이기 때문이다.

 

 

 

2. 은혼의 배경

 

⊙역사적 배경

은혼은 패드립 섹드립과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들을 넘어서, 세계관 자체만으로 매력적이기도 하고.... 또한 내게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세계다. 일본이 겪은 개화기의 파란만장함이 소라치가 상정한 배경이지만, 내게는 "일본"이라는 또다른 침략자에 유린당하고 '혼'을 빼았겼던, 언젠가의 내 나라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말하곤 했다.

"긴토키들이 제대로 '독립'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고.

 

만약 긴토키 일행이 천인으로부터 에도의 진정한 독립을 이뤄낸다면, 천인이 가지고 있는 위상은 우리에겐 고스란히 일본의 그것이 된다. 나는 만화를 포함해 일본의 그 어떤 작품에서도 이것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내용은 보지 못했다. 또한 그것이 일본 작가들 개개인 수준의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국가적 차원의, 그리고 역사와 이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 개인 수준의 반성이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고, 위에서 아래로 국가에서 구성원으로, 이념에서 개인 신념의 방향으로 이뤄야 하는, 이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항상 느끼는 어느 정도의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만화를 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대 일본 작가에게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아서다.

 

여하튼 바라지 않는 건 둘째치고, 그렇다면 이 상황을 '일본'작가인 소라치는 과연 어떻게 풀어갈까??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그 때문에 은혼을 지켜보는 게 더 즐거웠다.

 

결론부터 말하면 '의외로' 독립은 할 것 같고, 역사를 어느 정도 따라가며 (드디어) 즈라가 두각을 나타내는 내용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대강.

 

오 그래? 뭐 나름 좋다 치자.

ㅡ 그럼 긴토키는?

 

 

⊙긴토키 개인에게 은혼이라는 배경

실패한 양이 전쟁. 천인에게 나라를 넘기고 유명무실해진 쇼군, 국가. 억압 받는 에도 사람들.

"사무라이가 검을 빼앗긴 세상"

 

......칼이 남성성, 즉 남근을 상징한다는 기본적인 메타포만 생각해도 이 세계는 참담하다.

그 중에서 특히 "양이 전쟁" 한가운데 몸담았던 긴토키에게, 에도는 실패와 굴종과 패배의 세계.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긴토키의 쓰레기 같은 생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나름 적응하며 살아가려면, 자신의 실패를, 자신이 믿고 따랐던 것의 실패를 인정해야만 하고, 본인 또한 패배자가 되어야 하니까. 긴토키는 쓰레기처럼 살지언정 어딜 봐도 패배자의 마인드는 아니다. 적응과 순응을 거부한다. 칼 못 쓰게 하니 목검이라도 차고 다니는 거 봐라. 최소한의 자존심과 '정신'은 남아 있는 것이다.

 

패배자가 싫다면, 천인에게 빌붙어 사는 방법도 있다. 일본인에게 붙어 같은 국민을 괴롭히고 착취하며 살았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처럼. 이건 소년만화 주인공이 취할 자세는 당연히 아니니 애초에 가능성이 없는 선택지기도 했다. 과거가 더러운 채 시작하는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시체 밭에서 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며 살던 긴토키의 어린시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더러움'. 그때의 긴토키는 더럽다고 할 수도 없고.)

 

.........혹은 예술가가 되거나?

그러나 예술가란 것도, 작품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다. 긴토키가 그런 에너지 쏟는 일 할 리 없지 않은가.

 

 

 

3. 사카타 긴토키, 내 은혼 최애캐

 

내가 은혼에서 긴토키를 제일 좋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은혼에 카카시 같은 캐릭터는 없지만, 카카시의 일면이 언뜻 언뜻 보이는 캐릭터들은 있다. 긴토키는 카카시와는 매우 다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은혼 초반의 긴토키에게서 카카시의 일부를 보았다.

 

처참한 과거, 그럼에도 묵묵히 살아가는 인생.

모든 걸 잃었지만, 다시 소중한 것들을 때론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덕지덕지 붙여가며 사는 삶.

.......죽을 수 없는 생.

 

긴토키와 카카시의 다른 점이라면,

카카시는 피 흘리며 걷고 있었던 반면, 긴토키는 그저 멈춰 있었다는 것이다.

카카시가 '무언가'를 찾으며 헤매고 또 헤매던 인생이라면,

긴토키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를 잃어버린 인생이다.

 

카카시와는 달리, 긴토키에겐 스스로에게 단죄를 내리는 자학적 요소도 (거의) 없고,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다. 그와 대응되는 의미라고도 생각하는데, 그래서 긴토키는 카카시처럼 거울로 삼을 만한 인물도 이정표도 없다. 

 

말 그대로 그냥 내던져진 상태. 그것도 이전엔 없었던, 이전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거대하고 부조리한 사막 한가운데.... 어디 서 있는지 알 수 없고, 방향도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런 힌트도 없는 세상 속 자아. 더 나아가 긴토키는 아예 "어디론가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쓰다 보니 우울하다. 긴토키는 우울한 자식이다.

 

 

내가 긴토키를 좋아할 수 있었던 이유.

긴토키의 '현상태'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앞으로 펼쳐질 만화 내용 속에서, 이 거지같은 세상과 계속 조우하면서, 무한히 뻗을 수 있는 성장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게 긴토키는.. '성장해야만 하는' 캐릭터였다.

 

 

 

4. 사카타 긴토키, 입만 산 캐릭터

 

만화를 보고 있자면 긴토키가 제대로 성장할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내가 긴토키에게 처음으로 의문을 느꼈던 순간은, 동란편의 그 유명한 명대사. 

 

"내가 지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명대사로 꼽힐 만큼, 언뜻 멋있어는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 의미란 게,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던가?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회 속 한 개인일 뿐이라 한들,

이명박그네 정부 아래 9년 동안의 삶과, 현 문재인 정부 아래서의 삶이 어떻게 같다고 할 수 있는가?

 

하물며 나라를 잃기 전, 정체성을 잃기 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때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뭐든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먹어치워가며 겨우 연명하는 삶 속에서의,

'지키는 것'의 의미가 어떻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긴토키의 저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에서라면 가능하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라는 의미라면 가능하다.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긴토키, 네 삶의 의미가 "소중한 것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 "소중한 것"은 어디에서 오며, 너는 "무엇"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인간이며,

그것을 "지킨다"는 의미는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무엇으로부터의" 지킴이며, "지킨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있다.

바로 내가 속한 세계와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 사이의 "격차를 이해"하고, 정녕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자문하며, 자신의 내면과 주변 세계를 그 중간의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관계 맺는 것이다.

 

애초에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자아, 그 상태로 갑작스레 내던져진 세상 속,

그 안에서 그래도 방향을 잡고, 걸어나가기 위해서 내 정신과 세계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를

고민하고 정의하는 관계 맺음.

 

그게 성장이다.

지독하고 구역질 나는 기표와 껍데기들 속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으려 세상 속으로 내딛는 한걸음.

 

 

긴토키의 모든 대사는 번지르르 하고 그럴듯하지만, 동시에 모든 부분에서 성장에 관한 고민, 거기서 오는 고통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이(일부 예외가 있을 때도 있지만) 에피소드마다 거듭되는 걸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긴토키는 대체, 이 거지같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인간인가.........?

 

 

 

5. 성장의 지연

 

긴토키나 은혼이라는 만화에 갖고 있던 의문에도 불구하고 중반까지 계속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저 만화가 병맛미에 빠져 나와야 할 과정이 단순히 지연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나루토 리뷰를 하면서 다른 만화 예를 들 때도 많았는데, 분명 그 리뷰들 곳곳에 은혼과 긴토키에 대한 말도 있을 것이다. 어떤 요지의 말이냐 하면, 지연되고는 있지만-

 

"긴토키에겐 언젠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다"

 

긴토키의 성장 회피는, 만화가 갈등을 해소하고 끝을 보려면 언젠가는 부상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통렬한 고민을 해야만 하는, 결정의 순간은 반드시 온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6. 각각의 사무라이

 

세계와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선택을 기피하는 긴토키의 논리가 가장 절정을 찍은 부분이 아마 '쇼요의 죽음'과 함께, 쇼요의 가르침이라는 '각각의 사무라이로서의 길'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긴토키가 쇼요를 죽였다는 내용이 나왔다고 한참 회자되길래, 뭐 그런 개떡같은 스토리가.. 하면서 찾아본 적이 있다. 살짝 옆으로 새서 말하자면, 쇼요의 정체가 뭐 이상한 외계생명체ㅡㅡ가 아니라 정말 "인간 쇼요"일 뿐이었다면, 이 만화는 긴토키가 쇼요를 죽인 순간 거기서 끝이었을 것이다. 자가당착. 어떤 변명으로도 긴토키 삶은 정당화 될 수 없었을 테고, 모든 스토리도 다 꼬여버렸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쇼요의 다른 정체가 있었다는 흐름은 좋다.

이것은 쇼요의 죽음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자신이 믿었던 것으로부터 당한 배신"이다.

(애초에 그 '다른 정체'를 깨운 게, 긴토키 손으로 쇼요를 죽임으로써였지만- 이것도 좋다.)

 

욕망의 대상이 그저 허상이었을 뿐임을 깨닫는 사건.

성장하기엔 딱 좋은 발판인데...........

이제 과거 속의 스승이라는, 자신을 죄책감 속에 영원히 묶어 놓는 그 '상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또다른 '상징'을 찾아 나아가면 될 일인데............

 

거기에 힌트가 된달까, 혹은 그 자체인 "쇼요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소라치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내용이라는 게 문제다.

 

솔직히 그 부분 봤을 때...............

진짜 어이 없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극단적 개인주의"로서의 사상.

14년 당시에도 그 네타를 보고 내가 대강 쭈절거려 놓은 것이 있는데, 그 일부를 가져와 본다.

 

 

나도 나라네 명예네 하며 폼잡는 거 딱 질색이지만
이건 뭐 담론이 없고 파편만 있어....

너희한테 남은 건 잃은 억울함 아니면 다시는 잃기 싫다는 욕심 뿐인가.
그렇게 각각의 사무라이?
완전하게 자유로운 점이 어딨어, 니들의 좌표도 결국 세계 안에 있는데
왜 그 관계를 정의하지 않아? x축 y축 z축 어디쯤에 서 있는지 왜 스스로 보려하질 않냐고.
이건 뭐 도망치거나 거부하는 놈들끼리 싸우고 있어
정의네 신념이네 그딴 거 치우더라도
그렇게 싸우고 칼질하는 이유 안에 오로지 개인만 있다면 그냥 미친 놈들일 뿐 아니야?

.

보편적이고 일반화된 문제의식과 결론이 없다고. 서사 차원이 아니라 긴 개인차원에서라도 있어야 하고 정상이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게 전혀 보이질 않는다고.

그게 없다면 말이 좋아 각각의 무사도와 사무라이지, 그냥 망나니들일 뿐이잖아 ㅅㅂ

 

 

...그렇다...........

오로지 '내가', 아 나라고 세계고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내가 원해서' 지키고 싶은 것 지키고 가고 싶은 길 가면 그만이라면, 그게 사무라이의 길이라면, 그건 고수해야할 숭고한 정신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살상무기 든 망나니들의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딴 게 사무라이라면, 없어지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저 당시 긴토키는 막부 편에 서서 타카스기와 싸우는 상황이었다.

긴토키에게 "막부"란 무엇인가?

앞에서 보았듯이, 자신에게서 스승을 빼앗아가고 천인에 굴복한 굴욕적이고 패배한 '나라'가 아닌가?

 

양이전쟁 당시, 긴토키는 국가의 입장에 맞서 대립하는 상황이었고,

14년도 저 상황에선 바로 그 국가 편에 서 있었다.

 

보는 독자 입장에서는, 그런 긴토키의 "위치 변화"에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라치든 긴토키든 발화하지는 않을 지라도, 긴토키가 매 상황 선택하고 있는 것들이 독자들의 상식적인 정의에서도 그다지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화가 최소한의 기본을 하고는 있다는 뜻이지만 문제는,

긴토키는 그것의 의미를 절대로 "고민하지 않고", "언어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가 각자의 생각대로 이해를 하든가 말든가, 긴토키가 내세우는 이유는 "어쨌거나 내게 소중하니까" 다.

 

양이전쟁 당시 막부와, 긴토키가 지키겠다고 선 막부는 다르다.

"막부", "국가", "쇼군" 이게 대체 다 뭐란 말인가? 그냥 기표다. 껍데기.

그 안에 담긴 것, "기의가 다르기 때문에" 긴토키의 세상 속 위치는 그것에 따라 달라진다.

기표 투성이의 세계에서 우리의 발을 이끄는 것은 기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의 기표화 할 수 없는 가치다.

 

긴토키가 자신의 입장을 정당하게 피로하고, 타카스기에게 말로써 정말 한방 먹여주고 싶다면,

수 많은 기표로 표현되지만 절대로 "정확하게" 지칭할 수는 없는 그 무엇을, 그 정신을, 그 "혼"을,

"자신만의 기표로 정의해야 한다."

 

이걸 소라치가 긴토키에게 부여해줄 수 있다면,

"은혼"이라는 제목은 이 만화의 훌륭한 마침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7. 나루토의 "닌자"와는 정반대 의미의 불쾌함, "사무라이"

 

나루토의 "닌자론"이 싫었던 것은, 닌자라는 지극히 일본스럽게 정신적이고 전체적인 개념 안에,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온통 매몰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 가장 큰 피해자가 카카시였고, 심지어 카카시는 스스로 문제 의식이 전혀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카카시의 자아 = 닌자 = 나뭇잎마을.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닌자가 아닌 카카시는 상상하기 힘들고, 언제나 말하지만 나루토 만화 내에서 가장 닌자다운 것도 카카시라고 생각한다. 카카시의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현대적 관점의 "개인"이라는 존재를 생각했을 때는, 카카시는 그런 면에서 불행한 인물이기도 하고, 한계가 있는 인물상이기도 하다.

 

..뭐 내남자 이야기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반면에 은혼의 "사무라이"라는 개념은........ 이 '닌자'와는 정반대의 극지점에 있다.

세상과의 관계는 눈 뜨고 보려하지 않고, 그럴듯한 말들로 버무린, "눈가리고 아웅"하는 개인의 욕구 발현.

 

28살 먹은 술에 쩔은 아저씨가 주인공인,

소년 아닌 소년이 주인공인 이 역설적인 "소년 만화"에,

아프고도 아름다운 성장 스토리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이 "사무라이론"은 굉장히 불쾌하다.

 

뭐, 다 맞다 치자.

그래, "각자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 것"이 삶이라고 쳐.

그 각자가 원하는 것이 충돌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가? 무엇을 더 지켜주어야 하는가?

 

이 세상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게 해주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렇게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다, 상징계는. 각자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 거니까, "다 옳은 것"인가? 그렇다면 "충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도대체 "사무라이"의 선혈 낭자한 칼부림 뒤에는 무엇이 있냔 말이다. 모두 자기 길을 갈 뿐이라면, 칼로 베는 수많은 목숨들에 대해서 누가, 무슨 책임을 지는지? 긴토키는 "자신의 사무라이 길"을 갈 뿐인 타카스기를 왜 막아서는지?

 

그런 부딪침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승패가 갈리고 나서도 "각자의 길을 가는 것뿐"이라고 할 건지? 승자의 입장에서 그런 말 할 건가? 혹은 패자의 입장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때가서도?

도대체 이 세상의 원리에 대해서 뭘 어떻게 정의내리고 받아들이고 있는 건지?

 

...............아, 이 개망나니들 진짜.

 

 

 

8. 신파치와 카구라, 그리고 "요로즈야"

 

긴토키보다 오히려 더 성장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이 아닐지. 이 또한 14년도에 네타보고도 생각했던 것의 일부인데.

 

그 타카스기와의 싸움에서 말도 안되는 사무라이론을 펴며 이빨까던 긴토키보다,

지구가, 사무라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내게 가르쳐줬다고, 난 더 이상 울보가 아니라고,

"지구에서 태어난 카구라"라고, 카무이한테 달려드는 카구라가 긴토키보다 더 성장한 어른이다.

 

"지구에서 태어난 카구라"

 

간단한 문장이지만, 정확하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하고 있다.

카구라에게는 이 문장이면 자신이 싸우는 이유도 충분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도 분명하다.

 

이건 신파치에게도 마찬가지인데,

"요로즈야"에서 일하게 되면서 신파치와 카구라에게 해결사는 작은 의미에서의 자신들의 "세계"다.

 

그것을 준 것이 긴토키이기 때문에, 이들에겐 긴토키를 따를 이유도, 지켜줄 이유도 차고 넘친다.

그 안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생각하고, 때로는 자신의 약함과 무력함을 깨달으며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지키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고 느끼기도 하는. 그래서 노력하는.

 

그러나 긴토키는 "요로즈야" 내에서는 그런 성장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인간이다.

긴토키에게 해결사는 본인이 세상과의 조우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공간이기 때문이다.

남의 일을, 그 무엇이든 해결해주는 해결사라니. 본인 문제를 외면하기엔 딱 좋은 구실 아닌가?

 

결말이 해결사를 계속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긴토키가 지금 상태 이상의 성장하는 인간이 되려면 해결사의 의미는 달라져야 맞다.

 

물론, 어떤 계기로 만들었든 해결사는 긴토키에게도 이미 또 하나의 집이고, 신파치, 카구라, 오토세 등은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요로즈야로 들어오는 의뢰를 닥치는 대로 하는 것만이 아니라, "요로즈야" 그 자체를 지키려고 하기도 하는, 긴토키의 노력은 조금은 극단적 개인주의에서 이미 좀 벗어나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로즈야"를 지킨다는 건, 해결사보다 더 큰 개념, 혹은 그 바깥의 무언가로부터 해결사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를 정의하고 있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그때 그때 스쳐가는 의뢰 속의 어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그 구성원으로 하고 있는 개념이니까 말이다, 해결사는. 좋든 싫든 무의식적이든 의식하든 어느 정도는 "관계 맺음"이 일어나고는 있는 것일지도.

 

그러니까........ 이걸...........

더 크고, 보편적으로 확대시키란 말이다. 소라치.......

 

 

 

9. 가부키쵸의 사천왕 편

 

8을 쓰면서 깨달았는데, 내가 은혼의 모든 에피소드 중에 "사천왕"편을 가장 좋아하는 건, 긴토키가 그 자신을 위해서 움직였던 편이기 때문이었나 싶다.

 

뭐랄까..... 이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애매한 상태의 인간이, "자신의" 무언가를 위해 거침없이 날뛰던 사건이기 때문이었을까..... 처음 볼 때도, 가장 좋다고는 느꼈지만 다른 편들과의 차이를 스스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시리어스 중 가장 싫어하는 건 동란편인데.

이건 아마 신센구미의 그 이상한? 싸움에서 느껴지던 되게 비정상적이고, 어떤 면으론 지극히 일본스러운 감성에 거부감을 느껴서였을 것이다. 나는 이토를 그렇게 보내주는 사나이들인지, 사무라이들인지, 일본인들인지, 군대/경찰인지...........의 이상한 우정을 이해할 수 없고, 불편하다.

 

 

 

10. 은혼의 불쾌함2 - 여성상

 

이건 소라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역시 일본이라는 나라의 한계이기도 할 텐데. 여성의 위상이 지극히 낮은 일본이 그리는 여성의 모습이란, 언제나 거부감이 든다. 거기다 은혼은 배경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매우 노골적이게 전근대적인 여성들만 나온다.

 

그나마 좋아하는 여캐는 츠쿠요 정도.

아마도 나는, 남성들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고 운명적인 여성이 그나마 자신의 운명에 맞서려고 하는 캐릭터 상을 좋아하는 것 같다. 츠쿠요가........ 그다지 거기에 완전하게 부합한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은혼에 나오는 여자들은 모두 매우 구시대스럽게 여성적이거나, 그냥 엄청 남자같거나? 둘 중 하난듯.

 

거기다 이번에 애니로 성전환 편을 보면서 든 불쾌함도 잊을 수 없다.

굉장히 무능력해진 여성화된 남자들, 이라든가. 남자가 되자 본래 남자들보다 더 날뛰고 다니는 여자들이라든가. 거기다 "암퇘지"라거나....... 등등의 불쾌한 단어 선정 또한.

 

거시기가 없으면 인간은 인간 노릇을 못하는 것이냐?

소라치에게 반문하고 싶었다.

 

근데 뭐, 주체적인 여성상 또한 역사 의식만큼이나 내가 일본 문화에 바라지 않는 것 222222 이므로,

길게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듯.

 

 

 

11. 긴토키는 웃지 않는다.

 

만화를 보면서, 긴토키의 미소를 기대했던 순간들이 꽤 된다.

뭐랄까.......... 예를 들면, "카카시라면" 웃었을 법한 그런 장면들이 있다. 카카시는 워낙 있는 듯 없는 듯 들어주던 캐릭터니, 나루토가 터무니없는, 그러나 반짝반짝 빛나는 본인의 포부를 떠들 때면, 뒤에서 조용히 혼자 미소짓는다.

 

긴토키에게도 그럴 수 있는 기회는 꽤 있었다.

구체적인 예가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음, 떠오르는 건 카구라 아빠가 처음 찾아와서 한바탕 소동이 있던 편의 마무리 부분 정도. 그 외에도 예로 들 상황은 많을 텐데, 찾아보긴 귀찮다. 여하튼, 에피소드 마무리 쯤에 각 사건에 얽힌 인물들이 해당 사건이든, 그것에 관한 어떤 '가치'나 '의미'에 대해 자기 감상을 말하는 상황이 종종 있는데, 긴토키는 뒤에서든 앞에서든 그걸 조용히 듣는 위치다.

 

가타부타 대꾸해줄 필요는 없지만, 그 말들에 웃어줄 수는 있지 않을까.

보통이라면, 웬만한 인물들이라면 웃기라도 할 그런 상황에서, 긴토키는 웃지 않는다.

 

소라치에게 긴토키는 그런 인간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예전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껏 말했듯이,

긴토키는 스스로 아무것도 받아들이고, 관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말들에 수긍하며 웃을 수 없다. 그런 말들은 인물들이 사건 속에서, 에도에서의 일상 속에서, 자신들만의 의미를 찾고, 그렇게 세상과 삶을 더 알아가는 과정이다.

 

...........긴토키는 그런 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웃지 않는다.

 

 

가끔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신의 가치관을 내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긴토키에겐 "어떻게"가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숨만 붙어 있으면, 아무렇게나 살면 그만인가? 긴토키 스스로가 그런 인물은 아니다, 분명히.

그럼에도 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가. 무엇이 두려운가.........?

 

 

내게 '웃음'이란 의미는 중요하다.

내가 이 세상 속에서 찾고자 하는 건 어쩌면, '진정한 웃음'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웃음이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모른다.

 

어쨋거나,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모르겠기 때문에 찾고 싶다.

그저 막연하게 삶의 끝에선 웃을 수 있을 거라고, 꿈꿀 뿐이다.

 

그래서 여러 기표로 그것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정체는 모르지만 내 의식이 쏟아내는 수많은 웃음과 관련한 기표 속에서 하나를 꼽자면,

그것은 분명, 이 세상이 주는 삶의 무게를 오롯이 받아들여야만 가능한 '무언가'이다.

 

........그러니까 긴토키는 웃지 못한다.

 

 

 

12. 소라치는 무엇이 두려운가?

 

제자리에 서 있든, 기어가든, 뛰든 걷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진검을 들 때든 목검을 들 때든, 긴토키의 삶도 계속 된다.

 

소라치에게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아예" 없었다면,

긴토키가 아무리 가부키쵸 뒷골목의 해결사로만 살아가려고 해도, 자꾸 양이네 신센구미네 쇼군이네 천인이네 등등과 엮여버리고,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질긴 인연들이 자꾸만 고개를 들이미는 그런 사건, 에피소드는 아예 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라치는 계속해서 묻기는 한다.

오늘만이 중요다하는 긴토키에게, "각자의 사무라이"의 길을 가겠다는 긴토키에게,

백야차의 과거를 던져주고, 쇼군을 지키게 하고, 잃게 하고, 즈라가 찾아오고, 타카스기와 싸워야 하고.

안 그래도 진검도 못쓰는 오체불만족 상황인데, 자꾸 곤란하게 만든다.

 

내가 웃음의 의미를 고민하듯,

소라치는 어쩌면 사무라이에게 "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고민 때문에,

검을 버릴 수도 없는 자가 진검을 찰 수 없는 세계를 만들었다.

........애초에 설정이 너무 우울하다.

 

.......그렇다고, "목검"으로 족한가?

혹은 "목검"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운가?

 

 

긴토키가 처한 상황은, 까뮈의 소설 <페스트>의 오랑시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거기 등장하는 파늘루 신부는 말한다.(신부의 이 설교는, 내가 살면서 듣고 보고 읽었던 그 어떤 종교인의 설교보다 감동적이었다. -종교적으론 이단에 속하겠지만.)

 

"...고통과 고통이 수반하는 공포와 공포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 땅 위에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놓으셨다. 그러니 우리는 페스트라는 장벽 아래 있는 것이며, 우리가 은혜를 찾아야 하는 곳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장벽들이 만든 죽음의 그림자에서다."

"이제 그들은 그 안에서 <전부 아니면 전무>가 갖는 가장 위대한 힘을 찾아내고 받아들여야 한다 것이다."

"모든 출구가 완전히 막혀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선택이라는 가장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는 얘기였다."

 

우리 모두는 목검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결코 그런 어중간한 것으로는 진의를 찾을 수 없다.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전부 아니면 전무, 중간지대는 없는 것이다.

 

 

.....검이란 것은,

쥐는 사람과 그것이 향하는 대상 사이에 놓이는 것이다.

긴토키가 진검을 쥐고 멋지게 자세를 취하려면, 어디에 서서, 무엇을 향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끝에 가서 검이 부러지더라도.

목검을 가진 것만 못하게 되더라도.

검을 제대로 쥐기도 전에 떨어뜨려버리게 되더라도.

혹은 누가 기다렸다는듯이 채어가 버리더라도.

 

알게 뭔가.

어쨌거나 쥐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그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도 검을 뽑는 것이, 삶을 긍정한다는 일이다.

 

 

 

13. 성장하는 소년들.

 

간혹 긴토키를 "완성형"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다. 소년만화 주인공 답지 않게, 어설픈 것 없이 멋있고 완벽하단 의미의................

왜 긴토키가 "완성형이 아닌지"는 굳이 더 쓸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내가 좋아하는 점프 캐릭터 중에 성장이란 의미에서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건 오이카와가 아닐까싶다.

카카시도 전체 생을 두고 보면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카카시의 대표격 이미지- 2부 초반-을 생각하면, 카카시도 성장해가는 단계 중 어느 지점이었으니 포함이 안 되는듯.

 

반면 오이카와는, 이미 본 시점에서부터 캐릭터가 너무 확고해서..........

스포츠 만화의 캐릭터로서는, 그렇게 비극적인 설정을 갖고도 말이다.

 

남을 향해 뱉는 말이, 입만 산 껍데기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그 본인이 그렇게 행동하고 그런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정공법일 것이다. 그리고 오이카와야말로 그런 인물.

 

경기는 매번 시작하고, 끝나고, 매번 승리와 패배를 안겨주지만.........

인생이라는 긴 여행은 정확한 승리와 패배가 정해져 있지 않은, 모험의 시간이다.

 

어떤 '경기'의 끝에서, 우시지마가 한 말에 대답하는 오이카와를 봐라.

우시지마의 그 말은, 오이카와의 모든 배구인생을 부정하는 말이었고, 그것은 어쩌면 그날의 경기결과가 뚜렷한 증거로서 말해주고 있던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이카와의 대답은 명료하고, 또한 정답이다.

"나의 '배구'는 무엇 하나 끝나지 않았다"고.

오키와와는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헌터X헌터의 키르아는 어떤가.

(가장 최근 복습해서인지, 쓰다보니 글 하나 파도 될 정도로 길어져서 접음)

키르아의 성장



루피도 마찬가지.

혹자는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너무 클리셰고 그것이 싫다고 하지만.

 

성장이란

이전/현 세계와의 결별이기도 하며, 그것이 무엇이었든 그것을 "죽이는" 일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며, 알은 세계다.

 

루피의 인생이 에이스를 만난 세계에서 시작되었다면,

루피의 성장에 에이스의 죽음은 필수다.............

루피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루피의 성장기는 '에이스 없는 세상'에서의 홀로서기다.

 

오늘만이 중요하다는 긴토키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오늘'과 제대로 결별해야 한다.

 

....성장이란 고통스러운 것이다.

 

 

 

14. 성장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이쯤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성장"이라는 거, 굳이 해야 하는가?

 

실제로도 진정한 성장 같은 건 끝까지 하지 못하고 현실을 살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그래서 성장해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게 대체 무엇이란 건지, 그것은 소라치가 생각하는 "검"이나, "타마시(혼)" 같은 것 만큼이나 애매하고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딴 거 꼭 얻어야 하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어떤 이유라도 붙여놓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이딴 걸 꼭 얻어야만 하는가를 고민하기도 전에 이미 욕망하고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러니 얻고 싶어서 얻는 거라기보다, 인간에게 성장은 어느 정도 숙명적이란 생각도 든다.

 

거기다 이 과정은 앞서 말했듯,

매우 고통스럽고............ 온갖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으며, 어이없고 허망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러면서 고통은 끝나지도 않는다.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인생이라는 건,

이 고통과의 싸움 그 자체.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싸울 때다.

결과를 보장 받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잔인하고 긴 시간과의 싸움 속에

모든 것을 내던질 때.

 

 

오이카와는 자신에게 없는 +알파의 재능과 대결하며 자신의 배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인생을 걸고 시험하고자 한다. ..........처음부터 끝이 없을 싸움이다. 알면서도 한다.

 

아직 많이 어린 키르아는,

세상이 주는 운명과 환경에 대해 계속 질문하며 "무엇이 내가 살고자 하는 인생인가", "그것은 옳은가"를 찾아가는 여행을 한다. 실패도 하고, 하룻강아지처럼 멋모르고 덤비다가 코가 깨질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 세상과 자신의 괴리를 계속해서 조절해 나간다.

 

루피는 원피스를 찾아간다.

'원피스'야말로 '무언가'의 다른 기표다. 정체도, 의미도 알 수 없는 그것을 어떻게 그런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지, 경이로울 정도로 루피는 거침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한다. 그 안에서 수많은 동료를 만나며, 긴 여정 속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여러 세력의 알력 싸움 사이에서 어디에 자리잡을 것인지, 매순간 선택하고, 버리고, 얻고, 잃으며, 배운다.

 

 

분명 긴토키처럼 가만히 있는 게,

이 사막을 헤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러울지 모른다.

또한 제자리일지언정, 패배와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해결사란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도

긴토키 나름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허나 그렇게 따지자면, 카카시의 암부 시절도 나름대로의 "싸움"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카카시가 그것에서 한발짝 더 나와 성장한 인물인 것처럼,

인간은 그 보다는 더 잘 싸우고, 더 성장할 수 있다.

 

 

볼품없이 구겨지고 부딪치고 떨어질지언정

성장하고, 성장하려 몸부림치는 인간은 아름답다.

 

우리는 왜,

꼴사납게 넘어지고 경기장 밖으로 튕겨나가면서까지 공을 받아치던,

오이카와의 그 절박한 몸짓에 감동하는가.

 

왜, 적의 발밑에 웅크리고 맞기만 하면서도

도망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신음하는 키르아의 눈물에 같이 눈물 흘리는가.

 

대체 왜, 죽은 형과 소중한 밀짚모자를 한켠에 묻어두고, 동료들과도 떨어져

춥고 고독한 스스로와의 싸움을 하는 루피를 보며 용기를 얻는가.

 

 

......그리고 왜,

긴토키를 보면서는 의문과 갑갑함을 느끼는가.

 

 

 

15. '진검'을 든 소년, 영웅.

 

소년만화는 영웅만화이기도 하다.

그것은 성장하는 인간이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는, '영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영웅이란 평범함을 대변하는 존재며, 평범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 믿는다.

영웅이란 특별한 게 아니며, "인간의 성장"이란 것 또한,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내가 나루토의 영웅론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나루토가 더 이상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은혼의 시작이나 사람살이의 군상을 포착하는 소라치의 시선은,

영웅-소년만화의 기본은 다 갖추었다 볼 수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고, 나의 모습이기도 한 "다메닝겐"의 모습이 바로 긴토키의 모습이다.

누구나 조금은 게으르고, 대충 살고 싶고, 그냥저냥 흐르는 현재의 상황이 언제고 계속되기를 바란다.

나도 소라치의 치즈빵 드립처럼, 온갖 하찮은 게 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라치는 왜 "성장만화"를 그리는가?

왜 그 자신이, 내면을 "기표화"하여 벌어먹는 "작가"의 삶을 사는가?

 

소라치는 스스로 은혼이란 세계를 만들면서, 이미 시작부터 수많은 "기표로서의 답"을 그 안에 심어놓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 정도 만화, 중반까지나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 다 와서 '제대로 된' 결론을 못내는 건지.

 

물론 여태 말했듯, 그 '자신만의 결론'을 내는 과정이란 매우 고통스럽다.

거기다 지금까지의 특별한 포지션이 그랬던 것처럼, 긴토키에게 그 결론이란 것은 즈라의 길, 타카스기의 길, 혹은 포기나 굴종, 지구를 떠나는 게 될 필요도 없기에,

파늘루 신부의 말처럼, 그런 것을 넘어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기에 더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다.

 

 

긴토키 몫으로 남겨진 질문.

사무라이의 혼이란 무엇인가. 사무라이에게 검이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과정.

 

그러나 그 과정이 고통일 뿐이라 해도,

진검의 '그림자'를 좇아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온통 '그림자'들로만 이루어진 이 세상 속에서,

그것에 끊임없이 다가가는 것만으로 결코 볼 수 없는 실체를 꿈꾸며.

 

실패가 예정된 여정일지 모르나,

결국 그 여정만이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진짜, '진실'이다.

 

 

 

나는 소라치가 긴토키에게,

소년만화의 주인공인 "소년"에게,

그에 걸맞은 아름다운 '진짜 검'을 쥐어주기를 바란다.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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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7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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