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어두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숲을 두 닌자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빠르게 귀를 스치는 차가운 공기가 쉭쉭-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낸다. 처음엔 달도 밝다 싶었는데, 목적지로 갈 수록 낮고 짙은 구름이 많아지고 있었다. 숲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텐조는 자신보다 한걸음 정도 앞에서 앞만 바라보며 달리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가면은 쓰고 있지만 이제는 이렇게 살짝 뒤에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아주 익숙하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텐조가 보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다. 이제 그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건 가면을 쓴 채 은빛머리가 바람에 일렁이는 옆모습이었다.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버린 그 모습, 이제는 가면 속의 그의 표정까지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카카시 선배!!」

「알고 있어!」

카카시는 짧게 대답하고 곧 멈춰섰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국경이었다. 이번 임무는 타국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 즉 정찰이 목적이므로 더이상 접근하기 보다는 주변에서 동향을 살펴야 했다. 카카시는 여기저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기초적인 탐색과 눈을 붙일만한 안전한 지형을 찾는 것이었다. 평소대로라면 텐조도 같이 도와야겠지만, 오늘따라 텐조는 영 임무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4인 1대로 움직이는건 암부도 예외가 아니지만, 모래마을의 긴급요청으로 일단 급한대로 두명만 출발했다. 사실 텐조는, 임무를 시작할때부터 왠지모를 두근거림과 임무와는 관련없는 이상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렇게나 동경하고 존경했던 사람. 종종 임무를 같이 하긴 했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움직인 적은 한번도 없었고, 임무가 아닐때에는 더더욱 만나기 힘든 사람이었다. 암부는 평닌자들과는 다르게 평소에도 되도록 얼굴 노출을 줄이고 생활범위를 최대한 간소하게 하도록 되어 있으니. 아니, 애시당초 아무리 같이 임무를 수행한다고 해도 서로 가면을 쓰고 표정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관계에서는 끈끈한 동료애같은 것이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 임무를 잘 마쳤다고 해서 다른 닌자들처럼 어울려 놀고, 쉬고, 하는 일도 없다.

텐조 역시 다른 암부의 닌자들하고는 그런 관계였지만, 이상하게도 카카시만큼은 예외였다. 본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볼때마다 감탄스러운 상황판단 능력과 적으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강함을 몇번이고 눈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강하기만 한’ 닌자는 널리고 널렸을 터. 카카시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판단능력과 전술은 가히 놀라울 정도인데, 그것도 언제나 ‘같이 움직이는 닌자들 모두의 안전을 고려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른 암부닌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사실, 규율상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카카시가 동료들까지 고려한 작전을 내놓을 때마다, 분명 불편해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암부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카카시의 의지는 강했다. 텐조는 왠지 그런 카카시의 행동에서 불편한 기분은 느낄 수가 없었다. 임무 수행을 위해 최고로 효율적인 방안대신, 비록 본인이 조금 위험하더라도 모두가 살 가능성이 높은 그런 작전을 세울때마다 그에게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슬픔, 같기도 했고 쓸쓸함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극도로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모습은 굉장히 감성적으로 보였다. 암부의 가면에 가려 표정하나 읽을 수 없지만 분명 그의 눈은 조금은 슬픈 빛을 띠고 있을거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텐조는 그런 카카시를 존경했고 언제부턴가 눈에서 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이게 단순한 존경심이 아니란걸 깨달았다. 카카시의 그 강함 속에서도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위태로움과 고독한 느낌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더욱 아름답게 했다. 그리고 그를 지켜주고 싶게 했다. 시간이 갈수록 텐조의 이런 감정은 더욱 뚜렷해졌고, 카카시와 함께 있을때마다 감정을 숨기고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마침내, 잠시나마 카카시와 둘이서 해야하는 임무가 떨어진 것이다.

한팔로 나무를 짚고 두리번 거리는 그의 모습. 텐조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의 적당히 마르고 적당히 근육이 붙은 하얀 팔에 드러난 암부의 표식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카카시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다.

「역시 정찰범위가 좀 넓군. 후발대가 와야 제대로 할 수 있겠어.」

「그렇겠죠. 뭐, 늦어도 아침쯤에는 도착할테니까요.」

「그래, 한 두시간이면 날이 밝을테니 그때까지 눈 좀 붙여볼까-」

텐조는 습관처럼 목둔술을 이용해 잘 수 있을만한 목조건물을 짓기 위해 인을 맺으려는데, 카카시가 텐조의 손을 저지하며 말렸다.

「잠깐, 여기서 그런 커다란 걸 지으면 들킨다고. 그냥 대충 침낭으로. 자리도 넓지 않으니.」

국경부근인걸 생각해서 알아서 좀 작게 신경쓰려 했었는데, 카카시는 예의 그 커다란 집을 생각한 것 같다. ‘선배도 참, 아무렴 제가..’ 하고 변명을 하려고 했으나 느릿느릿- 미적미적- 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자리를 펴고 있는 카카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럼, 분신술로 근처에 보초를 좀 세워 둘게요.」

「잠깐, 혹시 모르니 괜히 차크라 소비하지 마. 게다가 이 어둠 속에선 냄새로 감지하는 게 더 확실하니까.」

카카시는 텐조가 분신 만드는 것까지 말리더니, 팍쿤들을 소환했다.

「여, 카카시.」

「팍쿤, 아침까지만 좀 부탁할게. 잠깐 눈 좀 붙일테니 누군가 오면 즉시 알려줘.」

「응, 알았다.」

닌견들이 각 방향으로 흩어져 가자, 카카시는 텐조를 돌아보며 말했다. 보이진 않지만, 분명 상냥하게 웃고 있을 얼굴로.

「이 편이 훨씬 낫지?」

그러니까, 카카시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분신하나 만드는 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닌데도, 그만한 차크라가 임무의 성패를 결정할만큼의 상황이 아닌데도 이렇게 작은 일조차도 본인이 나서서 해버린다. 같이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를 향한 상냥함을 스스로에 대한 아무런 공치사없이, 치켜세움 없이 그저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발휘해 버리는 거다. 고맙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태연하게.

「... 역시 선배답네요.」

「아-?」

텐조는 설명대신 작게 소탈한 웃음 소리를 냈다. 텐조의 반응에 카카시는 ‘싱겁기는’ 하고 작게 읊조리며 자리에 누웠다. 꽤나 먼 거리를 와서일까, 카카시는 조금 지쳐보였다. 그나저나 잠깐 눈 붙일때 조차 쓰고 있어야 하는 가면이라니, 텐조는 새삼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엔 어느새 구름으로 거의 매워져 있었지만, 그 틈으로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듯 비집고 들어온 달빛 한줄기가 은발의 머리칼에 스며들었다. 적당히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카카시의 머리카락도 그에 맞춰 찰랑였다. 마치 은빛의 작은 요정이 춤을 추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중요한 임무중에 강한 적을 만났을때 조차 별 반응않는 텐조의 심장이 한층 밑으로 내려 앉는다. 텐조는 문득, 참을 수 없는 충동처럼 그를 불러보고 싶어졌다.

「카카시 선배.」

「..아?」

「..........」

「왜 부른거야?」

「아, 아닙니다.」

그저 뒷일은 생각않고 불빛에 달려드는 벌레처럼 이상한 충동에 이름을 불렀는데, 카카시가 대답하자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결국 적당히 할말도 찾지 못한채, 아니.. 정말 하고 싶은 말을, 그 충동을 눌러 담은채, 용건도 없으면서 괜히 자려는 사람 깨운 꼴이 되어 버렸다. 텐조는 이 싱겁고 떨떠름한 상황을 어떻게 무마할지 계속 머리를 굴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아닌척 숨기는 것도 정말 힘들군. 어떤 말을 해야 그냥 평범한 후배같을지를 전혀 모르겠단 말야..

복잡한 텐조의 머릿속과는 다르게 야속할정도로 나른하고 귀찮은 듯한 목소리가 다시 텐조의 귀에 들어온다. 어느새 카카시는 옆으로 누워 팔을 괴고 텐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텐조, 내 본명 좀 부르지마. 굳이 선배라는 호칭도 안써도 돼.」

「그치만 선배라고 하는 게 더 좋은걸요, 제가 유일하게 선배라고 부르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엄연히 암부의 이름이 있잖아.」

「음... 뭐였죠? 그 이름이.」

「에- 그러니까, .................까먹었네.」

「선배!!!!!!!!!!!!」

「뭐, 상관없으려나. 그냥 하던대로 해.」

카카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텐조쪽을 피해서 반대로 돌아누웠다. 아니 본인 암부명을 잊어버리다니. 보통은 바로 내뱉어야 하는게 정상 아닌가? 카카시는 가끔 이렇게 사람을 어이없고 벙찌게 만든다. 암부 최고의 실력자, 하타케 카카시가 맞는건가 싶을 정도로 허술한 모습. 게다가, 지금 돌아 누운 저거, 분명 본인도 민망해 하고 있는거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텐조는 카카시가 그렇게 귀엽게 보일 수가 없었다.

텐조의 눈에 비치는 돌아누운 카카시의 뒷모습은 큰 키에 비해 어깨는 의외로 선이 둥글었고, 호리호리한 체구에 머리카락마저 밝은 색이라 묘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그런 뒷모습을 감싸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런, 매번 이런식이면 더이상 숨기는 것도 힘들겠군. 오히려 지금 상황이 기회일 수도 있어.

조금 전 할 말도 없이 무언가에 이끌린 듯 카카시를 불렀던 것처럼, 텐조는 다시한번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카카시가 정말로 잠들어 버리기 전에, 지금까지 감춰왔던 걸 말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도 막상 카카시를 다시 불러 일으키려니, 뭘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최악의 경우 뇌절이다...... 라는 생각이 들자 등에 식은땀이 한줄기 흘렀다. 마침 찬 바람이 불어 긴장해 흐르는 땀을 식히자, 텐조는 약간 추위를 느꼈다.

-그나저나 날씨가 쌀쌀하네.. 선배 춥지 않으려나.

툭, 투둑-

카카시가 감기라도 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찰나 텐조의 머리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그것은 곧 굵은 빗줄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 구름이 많더라니.

「겨우 잠드나 했는데 비라니, 이거 영 도와주질 않는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도 머리를 긁적이며 느릿한 몸짓으로 일어나며 카카시가 말했다. 그런 카카시를 보니 텐조는 오히려 이 비가 자신을 위해 내리는 것 같았다. 어설프게 밖에서 이렇게 자다가 감기 드는 것도 걱정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비를 피해야 하니 오히려 잘됐다. 마침 좋은 생각도 났고........

비때문에 냄새로 기척을 느끼기 어려워지자 닌견들을 돌려보내는 카카시를 보며 텐조는 닌견들 대신에 보초를 설 분신을 만들어 적당한 곳에 세워놓고, 목둔술로 비를 피할만한 곳을 만들었다. 새벽내 내리고 아침이면 그칠 소나기였지만 빗줄기는 제법 셌다.

밤이 삼켰던 세상을 다시 토해내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간. 내려갈만큼 내려간 온도에 비까지 내려 공기는 한층 더 싸늘해졌다. 비에 젖는 거야 피할 수 있지만 난방도 없는 임시거처에서는 추위에 떨며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을 듯 했다.

「에?? 뭐야, 텐조. 지금 소꿉놀이 해?」

파쿤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 돌려보낸 카카시가 텐조가 지어놓은 건물을 보며 어이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런 하이톤의 목소리라니,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게 텐조가 만들어 놓은 건물이 굉장히 작았기 때문이었다. 건물이라기 보다는 나무 줄기로 만든 작은 동굴같단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제대로된 문도 없고, 대신 한쪽 면이 완전히 뚫려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남자 하나 누우면 꽉 차버릴만했고 게다가 천장도 낮았다. 텐조가 먼저 들어앉아 있으니 옆에 겨우 같이 앉을 정도의 공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별로, 놀이를 하려는게 아니에요.」

「무슨 생각인거야, 그럼. 모처럼 좀 느슨한 임무이긴 해도 이런 장난칠 때는 아니잖아?」

「마음에 안들면 그냥 비 맞으세요. 저는 잠도 안오고, 잘 생각도 없어서요.」

「갑자기 무슨 고집이야, 너답지 않........엣취!!」

점점 몸을 적셔오는 빗줄기에 싸늘함이 드디어 목까지 그 기운을 전했는지 카카시는 가벼운 재채기를 했다. 몇초정도 텐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카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텐조 옆에 앉았다.

어두운 숲속으로 보이는 건 거의 없었지만 둘은 나란히 앉아 잠시 아무말 없이 있었다.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사이에 하룻밤 야영지로는 적당한 공터. 공기도 땅도 까맣게 잠겨 마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이상한 기운마저 느껴졌지만 거부감 드는 불쾌함은 아니었다. 빗방울들은 그 공간속의 무수히 많은 나뭇잎, 풀잎들을 때리며 고요한 숲의 정적을 흐트려 놓고 있었다. 그 검은 공간을 둘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으슬으슬 몸이 조금 떨릴정도의 한기가 둘 사이를 파고 들었지만, 모든 걸 깨끗하게 씻어내리는 듯한 빗소리는 나쁘지 않다. 차가운 공기도 숲내음이 섞여 나름 상쾌했다.

「이렇게 빗소리를 들으며 있는 것도 좋네요. 분위기 있고.」

「그래. 좀 추운 것만 빼면.」

「이거 덮고 있어요. 선배, 이런쪽으론 약하니까요~ 벌써 기침까지 하고.」

「.....나 그런 이미지인거냐.」

볼멘목소리로 말을 하면서도 카카시는 텐조가 건넨 모포를 둘렀다. 텐조의 왼팔에, 모포를 두르느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카카시의 몸이 부딪힌다. 비를 맞아 조금 젖어있는 그에게서 차가운 비내음이 전해져 온다. 무릎을 세운 채 양손으로 모포를 잡고 잔뜩 웅크리고 앉아서 ‘으.. 추워’ 라고 중얼거리는 카카시를 보고 있으니, 풋- 웃음이 난다.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문득 하얗고 긴 그 손을 잡고 싶을 때,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올려보고 싶을 때, 지쳐보이는 등을 안아주고 싶을 때. 그런 순간들은 계속 해서 늘어만 가는데, 점점 간절해져 가는데. 그런 자신의 마음을 카카시는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알게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예측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결과야 어떻게 되든 이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 텐조는 이제 안에서만 맴돌던 마음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 둘이 있게 되어서 그런지, 비가 와서 그런지.. 예정에도 없었고 조금 충동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진심이었으니까.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뭐지?」

조용히 마음을 다잡고 있던 텐조에게 카카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네?」

「시치미 떼지마. 네가 이유없이 이럴 녀석은 아니잖아?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걸 보면 무언가 진지하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거겠지.」

「역시 카카시 선배, 눈치 하난 끝내주네요. 못당하겠어요, 하하.」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긴장해서인지 살짝 식은땀이 흐르던 텐조는 괜히 크게 소리내 웃었다. 그렇게라도 긴장은 식히고, 용기를 내기 위해. 텐조의 웃음에 카카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텐조는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그럼.. 좀 벗어 줄래요? 그 가면.」

「이런 걸 쓰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란 건가?」

텐조는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카카시를 가만히 바라봤다. 카카시는 천천히, 하지만 망설임없이 가면을 벗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하얀 피부가 손에 잡히듯 들어온다. 살이 별로 없어 얼굴 선은 날카롭고, 은빛 머리와 함께 어울려 차가워 보였다. 잘못 잡으면 부서져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특유의 위태로운 분위기도 느껴졌다. 텐조의 시선에도 카카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빗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공간을. 텐조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카카시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건 꽤나 익숙하니까. 언제나 바라보던 모습이니까.

「한번만 말할게요.」

「..........」

「좋아해요, 카카시 선배. .................계속 함께 있고 싶어요.」

둘의 정적사이를 싸늘한 바람이 파고든다. 계속 긴장해 있느라 추운줄도 잘 몰랐던 텐조는 이제서야 공기의 차가움을 느꼈다. 몸이 살짝 떨려온다. 어둠이 텐조의 표정과 떨림을 감춰주고 있었지만, 정적이 길어지자 텐조는 더이상 카카시의 옆모습을 보고 있기 힘들어져 그냥 고개를 떨군다. 보고 있어도 잘 보이지 않는 표정. 선배는 내 말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춥다. 소나기에 숲 공기가 얼어붙은 듯.

「대답.. 안해주나요?」

텐조는 눈 앞에 펼쳐진 끝모를 검은 공간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텐조의 시선 끝에서 미약하게나마 새벽빛이 조금씩 밤을 밀어내기 시작하자 텐조는 대답을 기다리며 밤을 꼬박 지새우기라도 한 것같은 기분이 든다. 대답여하에 따라 텐조는 다시는 그를 옆에서 바라보는 것마저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바로 옆에 두고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다. 카카시는 대답 대신에 짧게 한숨을 쉬더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냥 여기서 나가려는 건가? 이렇게 거절 당하는 건가? 한순간이지만, 텐조는 별별 생각이 다 들면서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카카시의 행동은 텐조의 예상과는 달랐다. 어느새 카카시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모포 한쪽을 텐조의 등뒤로 둘러 주었다. 남자 둘이서 두르기엔 작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텐조는 바깥쪽 손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모포끝을 받아들고 가슴께로 당기며 몸을 움츠렸다. 카카시의 어깨가 텐조의 팔에 닿는다. 어깨의 딱딱한 느낌과 추위때문에 차가워진 피부.

「뭐, 이거면 대답이 되려나.」

「서, 선배. 받아 주는거예요?」

텐조는 너무 놀라 지금까지 한번도 그래본적 없을만큼 눈을 크게 뜨고서는 카카시를 쳐다봤다. 카카시는 조금도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틀림없이 약간 풀려있을 눈동자로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후배에게서 고백을 받고도 미동조차 없는 그는 곧 늘어지게 하품이라도 할 것 같았다. 텐조는 조바심이 났다. 그의 입으로 정확하게 확인을 하고 싶었다. 카카시는 안으로 조금씩 들이치는 비를 피하는 듯, 혹은 안으로 점점 번져오는 빛을 피하는 듯 몸을 더 움츠린다. 싸늘한 새벽공기가 파고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나른하게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듯, 태연한척 말을 하면서도 카카시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새벽빛에 얼핏, 그의 뺨이 붉어 보인다. 텐조는 묵직한 무언가로 크게 얻어 맞은 듯이 순간 멍했다가, 카카시에게 들은 말과 그의 표정을 이성의 범주로 겨우겨우 밀어넣었다. 그러자 곧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온 몸을 휘감았다.

「선배!!!!!!!!!!!」

「으윽.. 왜 이래, 징그럽게.」

기쁜 나머지 텐조는 카카시의 양 어깨를 잡고 자신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 힘이 너무 지나쳐 중심을 잃은 카카시는 등을 벽에 부딪혀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지만 텐조에게 이미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같이 덮고 있던 모포가 흘러내려 다시 찬 공기가 느껴진다. 까맣기만 하던 숲은 새벽 빛과 여전히 가득 깔려있는 비구름때문에 회색으로 물들어 가고, 그 속에서 온갖 풀과 나무들이 제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텐조의 눈에 카카시의 얼굴이 내려다 보인다. 언제나 바라보던 옆모습이 아니라, 가면이 아니라, 모든 것을 드러낸 원래의 모습이. 왼쪽 눈에 남겨진 흉터와 발동되어 있는 사륜안이 아름답지만 마음 아프기도 하고, 오른쪽의 푸른 듯 검은 눈동자는 깊고 무거우면서도 애틋하다. 하얀 피부는 차갑지만 부드러운 눈같았다. 텐조는 그 모든 게 너무도 벅차서, 영원히 멈춰있을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계속 카카시를 바라보았다.

「아프잖아, 머리.. 부딪혔다고.」

텐조가 자신을 놓아줄 기미가 없자, 한동안 그런 텐조의 눈을 지그시 보던 카카시가 결국 민망한듯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처음 접하는 카카시의 그런 모습에, 텐조는 끝없는 평행선일 것만 같던 관계가 진전되었다는 걸 실감하며 카카시에게 더욱 다가간다.

「하하, 미안해요. 그래도..」

「윽, 그만 밀어.」

「가만히 좀 있어봐요.」

옆으로 고개를 돌려버려는 카카시를 텐조가 다시 자신을 보게끔 만들자, 카카시는 급기야 눈을 질끈 감는다. 텐조는 그 모습에 풋, 웃음이 나는 걸 삼키고는 카카시의 은빛 머리칼을 쓸어올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슬며시 눈을 뜬 카카시가 얼른 텐조를 밀어내고 자신도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특유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곧 후발대가 도착할거야. 준비해.」

「네, 카카시 선배.」

어느새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숲의 푸른 모습이 아침임을 알리고 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어느덧 소나기는 그치고 얕아진 구름들이 바쁜 듯 쉼없이 흘러간다.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 풀잎에 맺힌 빗방울들과 부딪혀 쏴- 하는 소리를 내며 아쉬운 듯 소나기의 여운을 전해온다. 텐조는 조금 더 둘만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지만, 앞으로 있을 시간들이 더욱 많을테니 일단은 접어 두기로 한다. 구름들 사이로 점점 파란 모습을 드러내는 하늘, 그 어떤 날보다도 상쾌한 아침이었다.

.

.

.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면서 텐조는 한가지 의아한 점을 계속 생각했다. 분명 자신에게는 영원처럼 긴 시간이었지만, 카카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백을 듣고 받아들이기까지의 그 시간이 매우 짧았기 때문이었다. 딱히 준비된 계획도 없이 한 고백이었는데, 왜 그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걸까. 다시 가면을 쓰고 자신보다 약간 앞서가고 있는 카카시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텐조는 그 생각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다렸어.」

「네?」

「너의 그 말, 기다렸다고.」

「선배.. 알고 있었어요?」

「내가 눈치 하난 끝내준다며, 네가 말했잖아?」

「그치만 어떻ㄱ..」

「게다가ㅡ 보통 그렇게 맨날 뚫어지게 쳐다보면, 눈치 없는 사람도 눈치 챌 수 밖에 없을 걸.」

텐조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시선을 계속 느꼈을 카카시를 생각하니 순간 부끄럽기도 하고, 모른척 했던 그가 조금은 야속한 기분도 들었다. 또 그것도 모르고 혼자 고민만 하던게 모두 허사였다는 게 좀 허무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쁜 마음이 가장 컸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 고백을 기다렸다는 건 카카시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란 거니까.

「제가 좀 어리석었네요. 선배 마음도 모르고 여태 쓸데없는 고민만 했으니.」

「뭐,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지. 결국 잘 됐잖아.」

남의 이야기하듯 대답하는 카카시였지만 텐조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저 가면 아래에서 예의 그 상냥한 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을.

어느새 햇빛에 달궈진 공기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적당한 온도가 되었고 바람이 기분좋게 얼굴을 스친다. 구름 한 점없이 맑고 파란 하늘이 언제 소나기같은 게 있었냐는 듯 시치미를 뗀다. 하지만 텐조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와 함께 들었던 빗소리, 싸늘한 공기와 비를 피해 있었던 그 공간, 그에게서 풍겨오던 비내음. 소나기처럼 짧지만 선명했던 그 시간을.





-Fin.



2011. 9. 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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