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평생을 안고 갈 후회도,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비참함도ㅡ 죽은 이의 차가운 침묵 속에서 그 누구도 아닌 자신 스스로가 간절히 바라왔던 것이란 사실을. 그 바람만이 그를 살아가도록 해 줄 수 있었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그런 삶을 선택했다. 하지만ㅡ

이제서야, 그의 눈 앞에 다른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

사실 텐조는 알고 있었다.

그를 절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며 그의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가 짊어지고 있는 슬픔이 무엇인지. 무엇이ㅡ 아니,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벽을 절대 넘지 못하리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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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下.
written by pathos.
http://delusionalworl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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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실에 있던 텐조는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실려온 카카시에게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여기저기 소식을 묻고 다닌 것도 아니건만, 파트너로 임무를 자주 같이 하는 것을 아는 의료닌자들이 제 스스로 소식을 말해주어 상황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는 하지만 워낙에 체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인데다가, 차크라를 거의 소진해 버려서 쉽게 깨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차크라가 전혀 남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알긴 하는 걸까?’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잔인하리만치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 카카시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텐조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텐조는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그를 봐봤자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때로 사람은 뭐가 어떻게 되든, 평소의 자신과는 맞지 않아도 내키는 대로 행동할 때가 있다. 굳은 결심도 의외로 작은 충동에 깨어지곤 한다. 그것이 무엇에 이끌린 것이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짜 진심이 드러나는 것이든…

텐조는 문득, 카카시의 병실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새벽에ㅡ 그것도 우연히 잠에서 깨어나서. 그리고 도착한 병실은 비어있었다.

시체나 다름없는 몸으로 그가 깨어나자마자 갈만한 곳은 단 한군데 밖에 없었다. 텐조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다시한번 상기했다. 위령비… 어쩌면 가장 적당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카시에게 다시 한번 더,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

.

.

위령비에 도착한 텐조는 카카시에게 다가갔다. 꽤나 다치고 지친 상태인데다 이제 막 깨어난 몸이라 그런지 자신이 온 줄도 모르는 것 같다. 텐조는 카카시를 부르려다가, 잠시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미한 새벽빛에 담겨있는 카카시의 모습은, 기대어 앉은 위령비와 함께 차갑고 쓸쓸해 보였다.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진한 회색빛이 묵직하게 그 의미의 무게를 드러내고 있는 비석에 카카시가 안겨 있었다. 은빛의 머리카락이 간혹 바람에 흔들리며 비석에 부딪혔고, 안그래도 핏기 없는 하얀 피부는 전에 본데 없이 창백했다.

그리고 표정…

차라리 울고 있는게 나을 것 같을 정도로 괴로워 보이는 카카시의 표정은 바늘처럼 텐조의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눈물이 마르도록 울어 버리거나,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어떤 행동보다도 더 분명하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자기자신을 저주하며 살아왔고 얼마나 후회하며 살아왔는지. 지금까지 본 어떤 표정보다도 괴롭고 아파보여서, 텐조는 카카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카카시인 것마냥 속이 쓰려왔다.

분명 무리하게 움직여서 벌어졌을 상처에서 피가 베어나와 곳곳의 붕대는 빨갛게 물들어 있고 며칠동안 더 마른 몸이 가느다랗게 들썩인다. 이렇게나 아름다우면서도, 어째서 이렇게 슬픈 그림의 주인공밖에 될 수 없는 걸까.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카카시의 모습이 더 밝게 드러났다. 그때서야 텐조는 카카시의 왼쪽 눈에서 흘러내렸던 마른 눈물자국을 발견했다. 텐조는 괴로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카카시 등 뒤에 버티고 있는 위령비가 자신을 짓눌러 오는 듯 했다. 결국… 말하는 수밖에 없다. 텐조는 다시 한번 결심을 굳혔다.

“역시 여기 있었네요, 카카시 선배.”

카카시는 버릇처럼 오른쪽 눈만 슬며시 떴다가, 곧 그것조차 힘쓸 여력이 없어 왼쪽 눈도 같이 떴다. 눈 앞에는 텐조가 목발을 짚고 서 있다.

데자뷰처럼 며칠 전 함께 했던 임무가 떠오른다. 싸움이 끝나고 텐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지혈도 제대로 하지 않아 피범벅인 다리가 텐조가 얼마나 그를 찾아 헤맸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단서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아픔이라든지, 다른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은채 망설임없이 자신을 찾아다녔을 것이 분명했다.

「넌 어떻게 날 찾아온 거냐? 기척도 안느껴지는 거리에서.」

「음… 마지막으로 차크라를 느꼈던 방향으로 오긴 했는데. 딱히 ‘어떻게’라고는… 그냥 찾아야겠단 생각밖에 안하니까요. 너무 단순한가요? 하하.」

.

「소원, 다음에 말해 줄게.」

「다음이요?」

「응. 공짜론 안되지.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기밀이라고.」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글쎄?」

‘다음에도 날 찾아내면?’

하고, 카카시는 다음 말을 속으로 삼켰었다. 자신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말을 해주게 될지, 이대로 영원히 소원을 이루는 그날까지 혼자만 안고 살아갈지. 하지만 말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지금까지 생각했던 의미의 ‘소원’은 이룰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막연하게나마 들었다. 정말 그런 상황이 되면 그건 슬퍼해야 하는 걸까, 기뻐해야 하는 걸까…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 온거야.”

이 괴로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는 텐조를 눈앞에 두고, 할말을 찾던 카카시는 지난 임무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랄 것도 없죠. 여긴… 선배를 제일 찾기 쉬운 장소니까요.”

“그런가…”

카카시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는 듯 태평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맴돌았다. 둘다 서로에게 마무리 지어야 하고,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건 둘 모두에게 다 괴롭고 힘든 일이기에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쉽게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꽤나 밝아진 후인데도 위령비엔 쓸쓸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텐조와 카카시는 마주보고는 있지만 눈은 마주치지 않은 채 간혹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만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카카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소원, 궁금하다고 했었지?”

“네?”

예상치 못한 카카시의 질문에 텐조가 반문하자, 카카시는 말을 반복하는 대신 확인을 구하는 눈빛으로 텐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 네.”

‘지금에 와선 알 것 같지만…’ 하고 텐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텐조는 그가 말하는 소원은 알고 싶지가 않았다. 카카시의 표정만 봐도 충분히 알 것 같았기에, 직접 그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듣기 싫다고 말할 수도 없어 텐조는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밀이네 뭐네 했지만… 사실 시시해.”

“………”

“죽는거야. 하루라도 빨리. 어때… 너무 시시해서 실망이지?”

“아뇨…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카카시는 그랬냐는 듯, 의외라는 표정으로 텐조를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생각하게 된지는 얼마 안됐지만요.”

카카시는 보일듯 말듯 고개를 한번 살짝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옛날 일을 떠올리는 듯 눈빛이 점점 아련해져 간다.

“그 임무가 끝나고… 결국 오비토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마을로 돌아오게 됐었지. 난 도저히 알 수가 없었어. 도대체 왜 내가 살아서 숨쉬고 있는지…”

괴로운 듯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은 채 말하는 카카시를 보며 텐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가 아니라 내가 살아있어야 하는지. 내가 무슨 바보같은 짓을 한 건지… 이런 목숨따위, 몇번이고 그냥 버리고 싶었어. 몇번이고… 몇번이고……”

목소리가 점점 잠겨가는 걸 느낀 카카시는 말을 잠시 멈추었다. 목이 무거워지고 왼쪽 눈이 다시 시려온다.

텐조는 그 모습을 그냥 가만히 바라 보았다. 이래서 듣고싶지 않았다.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언제나 어제 일처럼 그 날을 잊지 않고 있었고, 어제 일처럼 괴로워 했다. 그건 텐조에게 역시 괴로운 일이다. 카카시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롭고… 오비토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적나라하게 깨닫게 되어 괴롭다. 이렇게 될 것을 알았기에 듣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텐조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왜…”

“왜 자살하지 않냐고?”

“…………네.”

“그가… 오비토가 구해 준 목숨이니까.”

카카시는 고개를 떨구고는 안타깝고 슬픈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의 몸은 이 곳에 앉아 말하고 있지만 정신은 그간 지내왔던 많은 나날들 속을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바보같은 판단과 선택때문에 그는 죽었고…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날 구해줬어. 목숨도… 잃어버린 한 쪽 눈도. 어떻게…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자살같은 걸…”

“…………”

“내 생명이 가치가 있다면, 내가 살아도 된다면… 그 이유는 오비토의 목숨을 대가로 내가 숨쉬고 있는 것이라는 것, 그거 하나야.”

텐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예상했다고는 하지만 직접 카카시의 입에서 이런 말들을 듣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괴로웠다.

“마찬가지 이유로 대충 살 수도 없었지. 닌자로서 말야… 오비토 몫까지 살아내야 했어. 그리고 기껏 그렇게 염치없이 목숨을 부지해놓고… 목숨을 아까워하며 살 권리같은 건 내게 없으니까.”

“…………”

“내가 보는 걸 그도 보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임무를 하다가 닌자로서… 그에게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 해서 싸우다 죽는 것, 그게 내 유일한 소원이야. 하루라도 빨리 이루고 싶어서 좀 무리를 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결ㄱ…”

“그만, 그만해요.”

텐조는 더 견디지 못하고 카카시의 말을 잘랐다. 카카시는 말을 멈추고 텐조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다. 하지만 텐조가 그에게 바랬던 건 미안함이 아니었다.

“선배 소원이 뭔지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만해도 돼요. 괴로우시잖아요…”

“…………”

카카시가 대답이 없는 것 조차 텐조에겐 아픔으로 다가왔다. 아무 대답이 없다는 것은 긍정의 뜻. 즉 지금까지도 괴롭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알아요. 이제… 선배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사실 그래서 왔어요. 그 말을 하러…”

“그 말을 하려고 온거라고?”

“네. 그러니까…”

텐조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발 밑에서 반쯤 삐져나와 있는 애꿎은 나뭇잎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로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텐조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들어 카카시와 눈을 마주쳤다. 카카시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힘이 드는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있다. 너무 지쳐보여서 이야기를 길게 하며 잡아두는 것조차 미안해질 지경이다.

“제가 몇달 전에 괜한 말을 해서… 선배를 혼란스럽게 한 것 같아요. 물론 그때 선배는 확실하게 거절했고 별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왔지만, 그래도 제가 그 말을 아예 안했던 것과는 다르겠죠. 조금이라도…”

“…………”

“가끔 선배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고, 내가 선배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게 이토록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제…”

텐조는 목발을 잡고 있는 손을 꽉 쥐었다. 슬픔에 몸이 떨려오는 것을 카카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 알겠으니까… 선배에게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왜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없는지도… 그러니까 이제 전 신경쓰지 않아도 돼요.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그건, 이젠 좋아하지 않는단 뜻인가?”

텐조는 카카시가 너무 지쳐서 질문을 잘못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정말 그 일을 없었던 걸로 하자는 거냐고 확인사살이라도 해올 줄 알았다. 하지만 엉뚱하게 자신의 마음을 확인해 오는 것이다. 답은 이미 알고 있을텐데도… 카카시 자신 또한 이렇게까지 말하는 텐조에게 더이상 무엇을 확인하려고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인지, 말을 뱉어 놓고나서 뒤늦게 생각해야 했다.

“전 선배가 원하는 삶을 살길 바란단 뜻이에요. 그게 무엇이든 간에… 게다가 이제 선배가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알았으니까… 그게 선배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제가 방해가 되는 건 추호도 원치 않아요… 진심으로. ………그것뿐이에요.”

“…………”

“먼저 갈게요… 선배도… 너무 오래 있진 말아요.”

텐조는 최대한 빠르게 몸을 돌렸다. 독하게 마음을 먹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는 지금까지의 마음으로 카카시를 볼 수 없을 터였다. 이왕 놓아주는 것, 거짓말이라도 이젠 좋아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했으면 좋았겠지만 결국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텐조의 시야가 희뿌옇게 변한다. 맺힌 눈물이 그대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땅을 디딜수도 없는 한 쪽다리가 눈치없이 아파온다. 그래도 이런 부상은 시간이 적게 걸리든 오래 걸리든 언젠간 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나을 수 있을까. 선배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나는… 날 용서할 수 있을까.’

완연히 날이 밝아 버린 아침이라, 카카시가 자신의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텐조는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까지의 거리가 몇광년이나 떨어진 곳처럼 멀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이어질 것 같던 대화가 생각지 못한 순간에 다소 일방적으로 끝나버린 이 상황에, 카카시는 황망해졌다. 빠르게 돌아서서 걸어가는 텐조의 뒷모습에서 그의 각오가 느껴진다. 천천히 목발을 짚어내며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모습… 점점 작아지는 그 등을 멍하니 보면서 다시는 이렇게 바라보지 못하겠지, 하고 카카시는 생각했다. 그런데…

‘다리는 괜찮은 건가?’

이와중에도 그의 다리가 걱정이 된다. 여기까지 오느라 무리한 건 아니었을까, 아직도 회복실로 옮기지 못한 것 아닐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오비토, 난…’

언제나처럼 그의 물음엔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매순간이 자신의 선택일 뿐이다. 지금까지는 선택지가 하나뿐이었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진 것이다. 더이상 모른척 하기엔 너무나 선명한, 새로운 길이 분명 그의 눈 앞에 있었다.

‘미안… 정말, 미안… 오비토.’

카카시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처음 위령비로 올 때보다도 오히려 통증이 더 심하다.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새 더 악화된 것이 분명했다. 하늘은 빙글 돌고 텅텅 빈 속은 위액이라도 넘어올 듯 울렁거린다. 식은땀이 온몸을 타고 흘러 내린다.

카카시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자 텐조는 잠시 멈칫거렸지만, 뒤돌아 보지는 않았다. 몇 초의 텀을 두었다가 다시 걸음을 내딛으려는 찰나,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깐만, 텐조.”

텐조는 걸음을 멈추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바로 뒤돌아 볼 수는 없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눈가에 고인 물기가 마르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카카시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텐조가 돌아서는 것을 확인한 카카시는 한걸음 한걸음 텐조에게 다가갔다. 다리는 부러진데다가 목발도 없어 금방이라도 바닥을 나뒹굴 것 같은 모습에, 텐조는 다시 카카시쪽으로 왔던 걸음을 되돌렸다.

이윽고, 두 사람이 마주섰다.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네.”

“분명 내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자고 했었지… 정말 그랬어? 네가 느끼기에도… 그 이전과 이후, 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텐조는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대체로 카카시는 자신이 고백하기 전과 다를게 없었지만 분명 다르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 카카시에게 와서 이런 말을 한 것도 결국 그것때문 아니던가? 혹시 자신이 신경쓰이는 것이라면, 그러지 않길 바랐기에 뼈를 깎아내는 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확실하게 해둔 것이었다. 그 일은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카카시의 이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단순한 사실을 알고 싶은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ㅡ 이제와서 그것을 말하는게 카카시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텐조의 표정을 살피던 카카시가 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질문을 좀 바꿀게. 그 날… 임무에서 돌아와서… 네가 날 안은채로 같이 있어달라고 했을 때…”

“…………”

“난… 거절했어야 하는 거지? 원래대로라면.”

“…………”

“분명 네 고백을 거절했었고, 그러니까 그런 행동은… 쓸데없는 기대만 생기게 하는 잔인한 거니까.”

“……잘… 알고 계시네요…”

“…………”

텐조의 대답에 카카시는 약간 무안해진 듯 말을 멈추었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고, 싸늘한 아침 바람에도 불구하고 온 몸이 젖어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니 처음부터 뭘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정리가 되질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전 정말 괜찮으니까… 그 일은 신경 ㅆ…”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처음으로.”

“……네?”

“이번 임무에서, 정신을 잃기 직전에…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텐조 너, 약속했잖아. 나 죽을 때 옆에 있겠다고…”

“선배… ”

“네가 없어서, 죽을 수 없었다고…”

“지금 무슨 말을…”

텐조는 지금 자신이 듣고 있는 말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꿈속을 헤매는 듯, 독한 진정제를 먹고 정신만 붕 떠서 공기중을 부유하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아…”

카카시는 한계에 다다른 듯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자꾸 술취한 듯 비틀거리다가 결국 중심을 잃고 몸이 크게 휘청인다. 텐조는 재빨리 한 쪽 목발은 놓아버리고 팔로 카카시의 몸을 잡아챘고, 다시 어느정도 중심을 잡은 카카시는 팔을 텐조의 어깨에 올리고 텐조를 지지대 삼아 섰다. 카카시의 숨결이 텐조의 귓가를 맴돈다.

“크게 변하지 않을지도 몰라… 하아… 아마도 평생 이 곳… 위령비를 떠날 수 없겠지. 지금까지 처럼 후회할거고, 지금까지처럼 날 용서할 수 없겠지. 하아… 그를 절대… 잊을 수는 없어.”

“…………”

“근데… 그냥 난 단지…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아. 하아…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모르겠어, 이런 나한테도 그럴 자격이 있는지…”

“…………”

“단지… 텐조, 네 다리가 걱정돼… 지금 이 순간에도… 하아… 난 그냥, 텐조… 네 마음이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면…”

“그만!!! 됐으니까, 그만 말해요.”

텐조는 카카시의 말을 끊고는, 그를 끌어 안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카카시와 텐조 사이의 공간이 사라지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르내리는 카카시의 가슴이 텐조의 가슴에도 그대로 전해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으니까…”

말과는 다르게 텐조의 눈에선 이미 눈물이 흘러내려 카카시의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뿌옇게 변한 시야로 뒤쪽의 위령비가 눈에 들어온다. 카카시의 등 뒤에 언제나 얹혀져 있는 그 무겁고 슬픈 그림자가…

하지만 이제 조금이나마, 그것도 나눌 수 있게 될 터였다. 카카시가 평생을 이 곳에서 서성이다가 마지막엔 결국 그 그림자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해도ㅡ 자신 또한 카카시의 삶과 죽음을 옆에서 함께 할 수 있을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텐조… 미안해. 이런 나라서…”

“무슨 소리예요, 제가 미안해요. 바보같이… 선배를 포기할뻔 했으니까.”

“응… 하아…”

“그리고 고마워요, 붙잡아 줘서… 전 용기가 없어서 절대 선배처럼은 하지 못하고… 평생 후회했겠죠…”

“응… 그리고, 나 좀 부탁해… 텐조…”

이 말을 끝으로, 카카시는 툭, 하고 고개를 텐조의 어깨에 떨구었다. 텐조는 잠깐 놀랐지만, 카카시가 숨쉬고 있는 것을 확인하자 곧 마음이 놓였다. 무리한 탓에 깊게 잠들어 버린 듯 했다. 선 채로 카카시를 안고 있는 텐조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목발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부탁한단 말만 남기고 대책없이 잠들어버린 카카시가 조금 귀엽다는 생각마저 든다.

잠든 카카시를 안은 채로, 텐조는 다시 위령비를 바라보았다. 위령비는 카카시의 삶, 그 자체다. 그를 벼랑끝까지 내모는 아픔임과 동시에, 끔찍한 절망을 겪었던 그의 손을 꼭 잡고 지금까지 살아오도록 이끌어주고 다독여준 친구였다. 이 곳마저 없었다면 카카시는 일찌감치 감당할 수 없는 자기혐오로 무너졌을 것이다. 위령비를 거부하는 건 카카시를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텐조는 이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이 조금이나마 카카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했다.

‘저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그저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이 사람 옆에서 나란히 걸어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니까… 그 자신의 몫까지 제가 사랑해 줄게요.’

텐조는 위령비를 향해 조용히 목례를 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태양이 내리비추고 있고, 작고 가늘지만 규칙적인 카카시의 숨소리가 귓가에서 맴돈다. 텐조는 다음에 카카시가 깨어나는 순간엔 꼭 곁을 지키고 있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가 아직은 살아있길 잘했다고 생각하길 바라면서….





-Fin.



2011. 9. 16. 0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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