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삭막함의 극치를 달리는 회색의 천장이 보인다. 나른한 몸을 일으키니 딱딱하게 굳어 시간조차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방안에 노을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 특별한 알람같은게 없어도 언제나 이쯤이면 잠이 깬다. 별 감정없이 출근 준비나 하려다가 쉬는 날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렇다면 급할 건 없다. 천천히 있는 걸로 대충 차려먹고 책이라도 읽으면 되니까.

어제는 오랜만에 맞은 혼자만의 평온한 밤이었음에도 다리는 무거운 추라도 달아 놓은 듯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억지로 짐을 옮기듯 다리를 어렵게 바닥에 내려 놓으려는데,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는지 커텐이 흔들린다. 여전히 이 세상에 색깔같은 건 필요가 없다는 듯이 들어오는 붉은 태양빛을 피하려고 몸부림 친다. 나부끼는 커텐 사이로 들어온 노을은 침대 시트마저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이 귀찮아 창문을 닫으려고 다가갔다. 강하지도 않은 햇빛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타는 듯한 노을이 날 노려본다. 그와 닮은 눈을 하고 있던 녀석의 눈빛이 떠오른다. 벌써 3일 전 일이다.

3일 전. 녀석이 이 방에 찾아 온 건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같이 다른 놈들을 이 곳에 들이는 것도, 책상 위에 움직이지 않는 담배 한갑도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질 무렵. 그러니까 한 달 전쯤인가 보다, 녀석이 처음 찾아 온 것은.

그 날은 바로 전 날 데려온 놈이 얼마나 거칠었던지 끊어질 듯한 허리통증에 평소보다 일찍 깨어났다. 언제나 그렇듯 옆에 널부러져 있던 놈은 어느새 나가고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한참동안 그냥 멍하게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도 올 일이 없는 이 곳에 벨이 울렸다. 나조차도 들어본적 없는 내가 사는 곳의 초인종 소리. 손님 중에 하나인가. 사실 바와 너무 가깝기때문에 바에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내 집정도는 알기 쉬웠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놈은 없었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려봐도 짚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스케다. 우치하… 사스케.」

18, 19살쯤 됐으려나. 미성년자 주제에 가끔씩 바에 드나들던 녀석이란 걸 확인하자마자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아 버리려는데, 녀석이 순간적으로 문틈으로 손을 끼워 넣고 뱉은 말이다. ‘우치하…’ 어떤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상황판단과 모든 계산을 재빨리 끝마쳐 버리는 내 머리도 그때만큼은 고장난 듯 멈춰버렸다. 내가 멍해 있는 사이 녀석은 손을 끼워 넣은 채로 그대로 현관문을 열어 제끼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뒤늦게 이젠 나보다 더 내 방 깊숙이 들어와 있는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이타치를 복제해 놓은 듯한 녀석의 눈이 보였다. 비슷한 키에, 흰 피부에, 까만 머리까지. 동생…이란 건가.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온갖 체액의 비릿한 냄새에 녀석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표정에 드러나는 혐오감을 감추지도 않았다.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어느정도 상황적응이 되자 혼자 있는 듯이 침대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녀석을 보고 있었다. 할 말이 없다기 보다는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이타치에 관한 거라면 할 말이 없는데.」

막 일어난 터라 상의는 입지 않고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그러나 쇄골께에 울근불긋한 자국들을 불쾌한 표정으로 집요하게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이 썩 유쾌한 것도 아니어서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차피 이야깃거리는 정해져 있는데 시간 끌 이유도 없었다. 심드렁한 한숨이 섞인 내 목소리에 여전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고 있던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타치때문에 온 게 아니다.」

「아아. 그런거였나.」

그렇다면 이야기는 더욱 빨랐다. 나는 여유있게 침대로 몸을 뉘었다. 하는 김에 바지 버클까지 풀어버릴까 하다가 밀려오는 통증을 참느라 그만 두었다.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서 있는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이런 때에만 발휘되는 짓궂은 친절함으로 한 손으로는 이불을 젖혀 들어오라는 제스추어를 잊지 않은 채.

「몰라줘서 미안하군. 얼른 끝내자고, 출근해야 하니까.」

녀석의 얼굴은 불쾌함을 넘어 혐오감으로 인해 일그러졌다.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얼굴의 미간은 더는 그럴 수 없을 만큼 잔뜩 주름이 잡혔다. 한발짝, 녀석이 다가왔다. 나는 그에 맞춰 이불을 잡고 있는 손을 좀 더 들썩였다. 다시 한번 내 상반신의 자국들을 노려보던 녀석은 옆 책상에 깊숙이 넣어져 있던 의자를 힘을 잔뜩 준 손으로 부욱 끌어 당겨 나를 보고 앉았다. 힐끗, 괜시리 책상 위에 놓여있던 담배를 한번 쳐다보고는 민망해진 오른 손에 힘을 풀었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이불은 힘없이 떨어졌다.

「처음엔 형을 찾으러 갔었다, 그 바엔.」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 내가 관심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는 어느새 무표정해진 얼굴로 녀석은 말을 시작했다.

분명 몇번인가 본 기억은 난다. 특히 처음 왔던 날은, 제법 어른스러웠지만 한 눈에 봐도 미성년자인 녀석이 너무도 당당하게 바에 들어와 가장 구석쪽의 테이블을 찾아 앉는 게 기가 막히다 못해 황당했기 때문에 기억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었다. 주문도 하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녀석을 보다못해 대충 손에 잡히는 캔콜라를 집어 들고 갖다 줬었다. 무슨 이유에서 오는 건지는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간혹 내가 쉬는 날에 오면 지라이야는 무슨 배짱인지 콜라에다 럼주를 조금씩 섞어주곤 했던 것 같지만, 난 쫓아내지 않는 것만이 내가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아량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이타치를 찾는 일같은건 아무래도 상관없게 되더군.」

「왜지?」

「카카시, 당신때문에.」

「아아.」

겨우 그런 재미없는 이유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건가. 한 번도 관심갖고 본 적 없었던 녀석의 얼굴만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치를 못 챘던게 신기할 정도로 그와 닮은 얼굴. 누가 형제 아니랄까봐 나보다 훨씬 어린 주제에 건방진 말투와 태도. 이타치와 좀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것 정도였다.

「그 곳에서 처음 이타치를 봤던 날, 그는 답지않게 남의 일에 참견을 하더군.」

「………」

「형이 그렇게 감정을 드러낸 건 그 날 나도 처음봤다. 당신을 몰아부치던 녀석에게 화가 나 있었지.」

「………」

키사메가 난동을 부리던 날, 이 녀석도 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타치와 키사메가 나가고 나서 조용히 뒤따라 바를 나서던 사람이 있었던 것도 같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조차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녀석 또한 내겐 스쳤다 사라지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걸 녀석은 모르는 듯 했다. 더이상 왜 이런 이야길 듣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자, 귀찮음이 몰려 왔다. 어서 내보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젠 상관없는 일이다. 그만- 」

「난 상관있어!」

얼른 나가라는 소리를 하려는데 녀석이 말을 끊고는 낮고 단호하게 말했다. 소리를 친건 아닌데도 크게 화를 내는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무표정하던 얼굴엔 다시 분노가 드러나 있었다. 눈이 유난히 더 붉어 보였다.

「이미 이타치 일같은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녀석이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게 중요했지.」

「………」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타치가 그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상대라면, 나나 가족한테 하던 것과는 다를 것 같았으니까. 당신을… 그저 지켜보는 걸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나는 이 달갑지 않은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남 일처럼 무관심한 목소리로 ‘그래서?’ 라고 받아치자, 녀석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피가 베일 정도로 입술을 물고는 부들부들 떨더니, 꽉 쥔 주먹으로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뭘 그렇게 담담한 척 하는거지?」

「뭐가.」

「망가지고 있잖아, 당신.」

「하아-?」

기가 막혀서 웃지도 못했다. 그 어이없는 말에 쳐다본 녀석의 표정은 더더욱 어이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나고, 뭐가 그렇게 억울하며, 뭐가 그렇게…… 안타까운 건지. 뭘 그렇게 애처롭다는 표정으로 보는 건지. 사람 인연같은 것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이다. 이타치는 자기 동생한테는 가르쳐주지 않은 건가. 아니면 알려줘도 못 알아먹을만큼 어리석은 녀석인 건가.

정말로 더이상 말 섞고 있을 이유가 없겠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대충 씻고 평소보다는 좀 일찍 출근할 요량이었다. 뻔뻔하게 남의 집에 쳐들어온 녀석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갈 기미도 없으니.

「말 끝났으면 나가라.」

「………」

아무런 결말도 내지못한 대화가 이대로 생산성 없이 끝나버리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았는지 녀석은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절로 한 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들어오라고 허락한 적도 없다는 건 알고 있지? 꽤나 악취미군.」

그제서야 쳇,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움직였다. 나는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 앞에서 달각거리며 문을 여는 녀석의 등 뒤에 대고 무심하게 한마디 던진 후, 나가는 모습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원한다면 자 줄 수는 있어. 그게 아니면 다신 찾아 오지마.」

그리고 3일 전, 두번째로 찾아온 녀석은 나의 마지막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어오자마자 키스부터 해댔던 거였다. 금세 관두고 또 다시 답도 없는 질문만 하다가 나가 버렸지만.

창문 하나 닫으려는데 왜 나는 그 녀석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문득 아까보다 어두워진 느낌에 이질감이 든다. 어느새 노을은 마지막 흔적정도만 남아 있었다. 좋은 소릴 들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떠오른다. 녀석에 의하면 난 ‘망가지고 있’는 거고 ‘자기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거다. 하지만 난 그저 배운 것을 충실히 행동에 옮기고 있을 뿐이다. 괴롭진 않다. 아프지도 않다. 아픈 건 내가 아니다. 영원할 수도 없고 보상받을 수도 없는 감정때문에 상처받고 있는 건 오히려 그 녀석이 아니던가.

동정 받아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녀석이었다. 결코 잡을 수 없는 걸 잡아보려고 애쓰는, 부질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녀석이다. 모래.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면 좀 편해졌겠지. 그리고 다신 오지 않겠지. 하지만 안타까움이 담긴 그 눈빛… 나에 대한 혐오감 뿐이었다면 차라리 편할 것 같은 그 눈빛이 영 거슬린다. 끊어질 듯 끊이지 않고 꼬리를 이어 떠오르는 생각을 머릿 속에서 치워 버리려고 일부러 힘을 주어 쿵, 하고 창문을 닫는다.

찝찝한 머릿속만큼이나 입이 텁텁하고 껄끄럽다. 어둑해진 방에 불을 켜고는 들어있는 게 없어 가볍게 덜컹이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지나칠 정도로 생동감이 없는 냉장고 안에는 언제 사 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반쯤 남은 생수 한병이 있다. 꺼내서 유리컵에 넘칠정도로 가득 담고는 한 모금. 그래도 마른 갈증이 쉽사리 가시지 않아 벌컥벌컥 다 들이키려는데, 방의 정적이 깨진다.

딩동-.

이 곳에 살면서 듣는 세 번째 초인종 소리. 이젠 이 소리의 주인을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묘한 느낌을 준다. 우치하 사스케. 정말이지 학습능력이란 게 없는 건가. 없는 척 무시하고 물을 마시려는데 밖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카카시! 있는 거 알아, 문 열어.”

건방진 말투는 차치하고, 귀찮다. 달갑지가 않다. 이 곳에 두 번 이상 찾아온건 이 녀석이 두 번째다. 물론, 첫 번째는 이타치였다. 어차피 어느 순간 바람처럼 너무도 쉽게 날려갈 거라면, 자꾸만 길게 끄는 이런 관계야 말로 가장 지저분하고 귀찮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물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달칵.

“섹스할 거 아님 돌아가라.”

일부러 직접적인 단어를 언급해가며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던지고 돌아섰다. 따라 들어오든 나가든 상관없다. 들어와서 또 시덥잖은 이야기를 꺼낸다면 내가 나가버릴 생각이었다. 더 이상의 불필요한 소모전은 사양이다.

침대로 와서는 푹신한 베개를 세워놓고 기대어 앉았다. 상반신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사스케를 눈 앞에 보고 있자니 마치 데자뷰같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 몸엔 아직까지 미처 사라지지 못한 키스마크들도 좀 남아 있을 거였다. 그것들이 사라질 때 쯤이면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누구였는지, 어떤 시간이었는지. 눈 앞에 있는 녀석도 나에겐 다를 바 없다. 썩 내키진 않지만 더 질질 끄는 건 내쪽에서 싫으니,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가르쳐 줘야겠다. 모래는 결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녀석은 두 번이나 와 봤던 이 색감없는 방을 새삼 둘러본다. 난 가만히 그 하는 양을 지켜본다.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녀석의 표정은 전처럼 화가 난 얼굴은 아니다. 무표정하지만 꽤나 안정된 모습이다. 전과는 다르게 눈동자에도 흔들림이 없는 것이, 녀석은 나름대로 정리가 된 듯 했다. 어떤 식의 정리든 오늘로서 끝이라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지만.

다소 경직된 자세로 서 있던 녀석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방향이 엉뚱하다. 녀석은 내 쪽이 아니라 식탁으로 가서 내가 한 모금 마셔놓고 내려놓은 물컵을 진지한 표정으로 집어들었다. 조금이라도 ‘마셨다’ 라는게 무색할 정도로 가득 담긴 물이 컵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찰랑이는 물컵을. 그리고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단 폼으로 침대에 앉아있는 내게로 똑바로 걸어왔다.

주륵-

녀석이 팔을 들어올린다 싶더니, 곧 정수리로부터 내 얼굴 위로 물이 흘러내렸다. 머리가 젖어 무겁게 가라앉는다. 나조차도 회색이라고 여길 정도로 칙칙하고 윤기없었던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은빛으로 반짝이며 시야 한켠을 가린다. 머리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슴께로 추락해 몸을 타고 흐른다. 이미 얼굴엔 방울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물줄기들이 주륵주륵 흐르고 있다. 차갑다. 머리가, 얼굴이, 몸이…… 내가, 젖는다.

“뭐하는 짓이지?”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그 눈이다. 혐오감도 분노도 사라진 채 안타까움만 남고, 정도가 지나쳐 독기까지 있어보이는 단호한 눈빛. 웬만해선 감정이 동하지 않는 나도 이쯤되면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눈으로 들어오는 물때문에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모래’ 라고 했었지?”

“……그래.”

“이게 내 답이다.”

어째서 이게 답이 되느냐는 물음을 입밖으로는 내지 않은 채 녀석을 노려본다. 이 예상밖의 상황에 당황한 건지도 모르겠다. 무슨 짓인지, 무슨 말인지 생각하려고 해도 머리에 쏟아진 물에 생각이 형태를 잡지 못하고 자꾸 씻겨 내려가버리는 기분이다. 뭐든 좋으니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녀석의 입으로 들어야겠다. 나는 답을 기다렸다. 말라 비틀어진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 물기에 대한 답을.

“난 모래처럼 쉽게 흘러가고, 부숴지고, 사라지지 않을 거다.”

“………”

“당신이 모래처럼 쉽게 흘러가고, 부숴지고, 사라지게 두지 않겠어. 나한테서만큼은.”

“………”

컵에 담겨 있던 물은, 얼마 안되어 보였지만 체감하는 나로서는 꽤나 많은 양이었다. 머리와 얼굴은 온통 흠뻑 젖었고 체온에 미적지근해 진건지 차가움은 사라졌지만 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언제든, 누구든, 잡으려고 해봐야 또 다시 빠져 나가버리지 않았던가? 애써 평소처럼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머리는 멈추고 흐르는 물기만이 몸을 감싼다. 물에 빠졌다 나온 것마냥 온 세포 사이사이까지 다 젖어버린 것 같다. 불편하고 무겁다 못해 아픈 것도 같다. 그런데도 왜 밀어낼 수 없는 것인가.

“이렇게 하면… 잡을 수 있으니까.”

녀석은 내 시야를 가리고 있던 잔뜩 젖어 뭉친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한움큼 잡아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던 물기가 녀석의 팔을 타고 흐르다가 다시 한번 톡, 내 손 위로 떨어진다.

“괴로워 하는 건 그만 둬.”

괴로웠던 건가. 아팠던 건가. 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에서 마치 기다려 왔던 것 같은 이상하고 그리운 느낌이 아릿하게 느껴진다. 녀석의 팔을 타고 내 손으로 떨어진 물 한방울이 묵직하다. 마치 이대로 손을 쥐면 손 안에 가득 찰 것 같다. 그렇게 내 손에 잡힌 채로 오랫동안 빠져나가지 않고 있을 것 같은 기분. 이번에도, 착각인가.

“난 머물러 있을테니까.”

머릿속에 떠오른 ‘착각’이란 단어에 기다렸다는 듯 녀석의 말이 들려온다. 겨우겨우 형체만 유지한채 버티고 있었던, 언제 바스라져도 아무렇지도 않을 건조한 모래 사이로 물기가 스며든다. 밀어 낼 수 없는 손길처럼 자꾸만 깊이 들어온다.

“아아, 그래.”

뭐가 그렇다는 말인지, 머물러 있겠단 말에 대한 긍정인지, 녀석이 한 모든 말에 대한 수긍인지 모를 대답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여전히 물은 내 몸을 타고 흐른다. 애당초 너무 건조했기때문에 오히려 거부할 수조차 없다. 사막을 헤매다 작은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반응해 모두 흡수해 버리는 느낌이다. 그다지 원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도 뿌리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젖은 모래는 단단해진다. 손에 가득 쥐어도 무너지지 않을만큼.

멍하게 있는 것인지 담담하게 있는 것인지 냉랭한 것인지. 녀석이 보는 나는 어떤 상태인 걸까. 약간의 혼란스러움에 문득 다시 바라본 녀석의 얼굴엔 이제 안도했다는 듯 여유로움까지 묻어난다.

나와 눈을 마주친 녀석이 보란 듯이 손에 든 유리컵을 팔을 뻗어 책상위에 올려 두었다. 그 모습을 눈으로 좇던 내 시선 끝에 유리컵 옆에 놓인 담배 한갑이 보인다. 내 시선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지 녀석이 다시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그리고는 어깨를 밀어 넘어뜨린다. 푹신하게 몸이 내려앉는다.

“이건 또 뭐야.”

“섹스할 거 아님 돌아가라며. 돌아갈 맘은 없다.”

“아아, 그래. 상관없어.”

녀석이 쇄골께에도 역시나 흘러 있는 물기를 할짝이는데, 엉뚱하게도 자꾸 책상 위에 놓인 담배가 눈에 거슬린다. 난 녀석을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손을 뻗어 담배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바닥에 붙어 있을 것 같던 담배곽은, 여전히 생각보다 가볍게 손에 들어왔다. 한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 나는 힘을 주어 담배곽을 구겼다. 꾸깃해지는 담배곽 안에 아직도 가득 남은 내용물들이 느껴졌지만 그대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넣었다. 내가 다른 데 신경쓰는 걸 알고서는 잠시 멈춰있던 녀석이 내 행동을 보고 있다가 묻는다.

“뭐 해.”

“별 거 아냐. 오래된 거라.”

웃어 보였다. 아주 오랜만에 웃는 것 같은 느낌이다. 흘끗, 쓰레기통 쪽을 본 녀석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더니 담배를 찾느라고 빠져나간 내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킨다. 입을 맞춰 오면서도 녀석의 손은 빠져 나가지 않는다. 그대로 내 손을 꾹 눌러잡은 그 손에서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가 느껴진다. 나도 지그시 손에 더 힘을 주어본다.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마지막으로 들어온 천장이ㅡ분명 회색인데도ㅡ 기분탓인지 언뜻 붉어보였다. 노을 빛을 가득 받은 것처럼.





-Fin.


2011. 9.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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