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믿고 있었다. 자신이 바래야 하는 것은 단 한가지뿐이라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그는 하나뿐인 소원을 위해 언제나 필사적이었다. 피냄새 진동하는 시체더미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며, 자신이 살아 있는 이유를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의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돌아보고 싶고, 힘든 몸과 지친 마음을 맡기고 싶은 그런 포근한 느낌의 그림자가.

그는 하늘에 묻고 싶다.

ㅡ나, 살고 싶어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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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中.
written by path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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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온 몸에 흐르고 있는 게 땀인지 피인지 구분도 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적의 숨이 멎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카카시는 그 옆에 쓰러졌다.

결국은 미처 아물지 못한 팔의 부상이 걸림돌이 되었다. 다친 팔을 전혀 쓰지 않자, 적은 곧 그 약점만을 집요하게 노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한다면 회복 불가능할만큼의 상처이니 그럴만도 했다. 싸우는 와중에도 ‘내가 저녀석이라도 이렇게 싸웠겠지.’ 하고, 카카시는 생각했다.

하지만 적이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카카시는 팔 한쪽이 아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 몸을 사리면서 싸우는 타입이었다면, 애당초 그런 부상을 입은 채로 임무를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적은 카카시가 완전히 한쪽 팔을 못쓴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카카시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했다. 자유롭지 못한 팔때문에 생기는 사각에 적이 깊이 파고들어 오자, 카카시는 기다렸다는 듯 부상당한 팔로 적의 급소를 찔렀다.

하지만 마무리가 너무 늦었던 걸까. 카카시는 쓰러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싸움이 길어진 탓에 체력도 바닥이고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다. 한쪽 다리는 뼈가 부러져 감각 조차 없다. 팔은… 정말이지 다신 못쓴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상태였다.

같이 온 동료의 싸움이 승리로 끝나고, 무사히 마을로 돌아갈 수 있길 기다리는 수 밖에는 방법이 없다. 만약, 그가 지기라도 한다면 카카시가 다음 차례가 될 것이고, 더이상 일어서 있을 힘조차 없는 그도 죽게 될 것이었다.

‘아니… 치료를 못받고 이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곧 죽긴 죽겠지.’

카카시는 널브러진 채 숨을 몰아쉬었다. 어지러운 시야로 들어오는 무심할정도로 맑기만 한 하늘. 어김없이 자신을 구해주고 먼저 떠난 옛동료가 떠오른다. 카카시는 어쩌면 드디어, 그동안 바래 왔던 것을 이루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너한테 가도 되는 걸까, 오비토.’

정신이 아득해지고 하늘이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사실 아무리 하늘을 올려다 보아도, 매일같이 위령비를 찾아가도 오비토는 카카시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럴 자격이 자신에게 생겨 있을지… 자신을 기쁘게 맞아 줄지.

카카시는 대답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자꾸 감기는 눈을 있는 힘을 다해 버텨가면서 계속 하늘을 바라보았다. 점점 현실감이 사라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가운데ㅡ 카카시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억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오비…토?’

카카시는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그 목소리가, 자신을 기다리는 대답일 거라는 막연한 직감이 들었다. 시야는 흐려질대로 흐려지고, 내려앉는 눈꺼풀때문에 하늘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의식이 완전히 흩어져 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카시는 좀 전에 뇌리를 스쳐지나간 그 목소리를 뚜렷하게 기억해내려 애썼다.

「선배가 죽을 땐, 제가 옆에 있어 줄게요.」

.

.

깨질듯한 두통과 함께 어렵사리 눈을 뜬 카카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원이었다. 온 몸은 미이라처럼 붕대로 휘감겨 있고, 모르핀을 얼마나 투여한 건지 통증은 상당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결국 자기 몫을 해낸 동료의 손에 이송되어 온 것이리라.

‘이번에도 실패군… 근데…’

카카시는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기뻐한 적이 없었다. 그에게 그런 감정은 일종의 죄악이자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달랐다. 그리고 그 평소같지 않은 감정은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내가 지금… 살아서…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는 건가?’

카카시는 멍하게 누워서 의식을 잃기 바로 직전의 순간을 다시 회상했다. 이번에야 말로 정말 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텐조였다. 텐조가 했던 죽을 때 옆에 있어 주겠다는 말. 하지만 그 자리에 텐조는 없었고ㅡ 엉뚱하게도 자신은 죽어가고 있는데 그 말을 지키지 못하는 텐조가-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카카시는 정신을 잃기 직전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었음을 떠올렸다. ‘지금은 죽을 수 없다.’ 고………

사실 카카시가 팔에 부상을 입은 채로 급하게 다시 임무를 떠난 것도 텐조때문이었다. 텐조를 병원까지 부축해주고 나서 카카시 또한 잠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치료만 받고 있으려니 카카시는 머릿속만 더욱 복잡해져 갔다. 그 임무에서 있었던 일들, 지금까지 텐조와 나눴던 대화들이 뒤죽박죽인 채 끊임없이 떠올랐다.

「아마도… 눈치 채셨겠지만…」

「뭘?」

「사랑해요, 선배.」

「아아.」

「……대답은 당장 안 해주셔도-」

「아니, 지금 할게.」

카카시는 분명, 텐조를 한 번 거절했었다.

「우선은 고맙다고 해야하나.」

「아뇨, 그런 말은 안해도 돼요.」

「미안해.」

「이유를… 물어봐도 돼요?」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를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아.」

「………」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냥 지금까지 처럼 지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 때까지 단 한 순간도, 카카시는 자신이 사는 이유를 잊은 적이 없었고 텐조에게 고백을 들었을 때도 흔들림이 없었다. 또한 그렇게 거절한 후에도 그 전처럼,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카카시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카시 자신이 무언가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이 바로 며칠 전 텐조와 함께 했던 임무에서였던 것이다.

며칠 전, 죽을 때 곁을 지켜주겠다던 말을 들었을 때 카카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었다. 선배한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아무렴 내가 너보다 먼저 죽겠냐고 장난으로 받아넘기고 싶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이끌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았을 녀석이. 죽을 때 옆을 지켜주겠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녀석이. 그것은 자신은 먼저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자, 언제나 먼저 동료를 떠나보내야 했던 카카시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카카시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카카시는 자신의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팔을 풀지 않은 채 텐조를 부축해 돌아왔고, 잠들 때까지 있어 달라던 텐조의 어리광도 받아주었다.

그런 자신의 행동들에서ㅡ 지금까지 흔들림 없었던 결심이 바람에 나뭇가지 흔들리듯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카카시는, 그 혼란스러움을 떨쳐내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요청하여 다른 암부닌자와 임무를 떠났던 것이다.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카카시는 공기가 답답하다고 느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며칠을 잠들어 있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한 밤중인 듯 창밖은 어둡고 달빛만이 고요히 병실 안을 비추고 있다. 카카시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텐조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떠났던 임무였는데ㅡ 그 곳에서 정말로 죽기 직전까지 내몰리고, 결국 다시 떠오른 건 텐조인 셈이었다.

‘나… 이래도 되는 걸까?’

카카시는 갑자기 급한 볼 일이라도 생각이 난 듯, 손등에 꽂혀 있던 링겔 바늘을 뽑아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한쪽에 세워져 있는 목발을 집어들고 절뚝거리며 병실을 나섰다. 온 몸이 고장난듯이 삐걱거리고, 곧 여기저기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다리도 다리지만, 팔이 더 심각한 수준이어서 목발을 짚고 팔힘으로 몸의 무게를 지탱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곧 목발을 집어던져 버린 카카시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밤중이라 그런지 병원은 고요하다. 덕분에 아무런 방해없이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부터 카카시는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빠져나가는 일이 많았기때문에 병원내에서 요주의 인물로 통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예 혼수상태로 실려와 정신이 든 것도 확인이 안된 상태이니 특별히 감시하는 눈도 없는 것이었다.

이제 막 병원만 벗어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카카시의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점점 숨이 차오르고, 한걸음 내딛는 것 조차 고통일 뿐인데도 카카시는 아랑곳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곧 잘 정돈되어 있는 탁 트인 공간에 도착한 카카시. 어두워 잘 보이진 않지만 달빛을 받으며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감고도 그림처럼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정경…

위령비.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임무로 마을 밖에 나가있지 않은 이상 매일같이 찾아오던 곳이라, 카카시는 이 곳에서 일종의 포근함마저 느낀다. 카카시의 모든 것이 있는 곳. 그가 살아온 이유이자 살아가는 이유.

‘나 왔어….’

마음 속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카카시는 짙은 어둠 속에 묻힌 비석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복잡하고 어지럽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 앉는다.

카카시에게 있어서 가장 편안하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장소는 집도, 그 어느 곳도 아닌 이 위령비였다. 몸이든 마음이든 힘들고 지쳤을 때 의지하고 쉴 수 있는 곳이자,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 마음을 정리하고 확신을 갖도록 해 주는 곳, 모든 걸 포기하고 삶을 끝내고 싶을 때마다 살아갈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곳. 오래된 연인의 품처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장소… 위령비는 카카시에게 그런 의미였다. 즉ㅡ

오비토는 카카시에게 그런 의미였다.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다리의 통증때문에 서 있기가 힘들어진 카카시는 비석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앉았다. 등으로 느껴지는 비석의 차가운 감촉과 불어오는 새벽바람이 흐른 땀을 식히면서 조금 한기가 돌았지만, 서 있을때보다 한층 더 이완되는 느낌이 싫지 않다.

지금까지와 다름없는 안락함.

변한 것도, 변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주는 편안함.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ㅡ

카카시의 머릿 속엔 다시 한번 텐조가 떠올랐다.

무심코 석고로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자신의 다리를 보다가, 문득 그 날 임무에서 보았던 텐조의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나무 뒤쪽에 몸을 가리고 있던 텐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제일 먼저 다리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걸을 수도 없을 정도의 부상이었다. ‘저런 다리로 여기까지 뛰어온 건가?’. 기막힘과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텐조를 부축해 주고 있었다.

“있잖아, 오비토.”

카카시는 등에 닿는 위령비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면서 동시에 붕대로 둘둘 감긴 둔탁한 모양의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내 소원은 언제 들어줄거냐.”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오랜 세월 가슴에 담아두었던 슬픔이 아릿하게 카카시의 온몸을 감싼다.

“살아있을 때도 그렇게 지각을 해대더니ㅡ 지금도… 네가 너무 늦으니까…”

위령비의 차가운 침묵. 카카시는 혼잣말조차 끝맺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올려다 본 하늘엔 달이 서쪽하늘 한켠으로 기울어져 빛은 처음보다 약해져 있었고, 대신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서클렛도, 복면도 하지 않은 그는 평소와는 달리 두 눈을 한껏 뜨고 대답을 갈구하듯 계속해서 별들을 바라 보았다.

왼쪽 눈이 유난히 시리다. 처음 그 눈을 받았을 때보다도 더.

“나 이제 여기서조차,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데… 이래도 되는 거냐.”

새벽바람이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가자, 이윽고 카카시의 왼쪽 눈에서 뜨거운 것이 한 줄기 흘러 내렸다.

“이 눈으로 다른 사람을 봐도 되는 거냐고…”

카카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눈을 감았다. 가슴이 쓰라리고 뻐근해져 온다.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마음과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를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괴로움. 다시 한번 오비토를 배신하는 거라는 생각에서 오는 죄책감…. 지금이라도 누군가 잡아준다면 다신 뒤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카카시는 흔들리고 변해가는 자신을 되돌려 놓을 방법을 몰랐고, 위령비는 여전히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렇게 한 동안, 카카시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욱신거리는 온 몸의 상처도, 어쩔 수 없는 마음도 새벽의 고요함에 잠시 맡겨 둔채.

.

.

“역시 여기 있었네요, 카카시 선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카카시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동쪽 하늘부터 점점 빛이 들기 시작하며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고ㅡ 눈 앞엔 텐조가 거짓말처럼 서 있었다.







2011. 9. 16.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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