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을까.
난 당신을 사랑했던 걸까.
당신은 날…

끝까지 물어보지 못한 이 질문도 같이 묻어둘게.
그날의 핏빛 노을과 당신의 붉은 웃음과 함께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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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노을에 그대를 묻는다.
(카카시총수연합 이벤트)
written by path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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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했다고? 몇년간 이렇다 할 단서도 못찾았던 놈들인데.」

「그렇다니까! 역시 카카시야.」

「게다가 이번엔 이타치와 콤비였으니까.」

「마을 역사에서도 찾기 힘들다는 환상의 콤비… 성공할 수 밖에 없었겠네.」

「…과찬이십니다.」


같은 암부이면서도 끝도 없이 띄워대는 통에 어렵게 한마디 대답했다. 바로 옆에 장본인들을 두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칭찬과, 나와 카카시를 ‘환상의 콤비’라고 칭하자 움찔거리며 나를 흘끗 쳐다보는 텐조라는 녀석. 그렇지만 정작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카카시, 그 임무 이야기 좀 해봐.」

「아ㅡ? 미안, 무슨 얘기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잘 매치안되는 3류 소설책에 또 푹 빠져있다. 남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떠들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못들었다는 듯 저 나른한 대답. 임무 중이 아닌 평소의 그는 정말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둔한걸까, 둔한척 하는 걸까.

책 내용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정독하는 그의 까만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눈가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의 은발은 햇빛을 받으면 옅은 노란 색을 띠면서도 푸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 반짝이는 머릿결은 마을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라, 가끔 보고 있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계속 쳐다보게 되는 일도 있었다.

가장 한가한 시간대가 지나고, 옹기종기 모여 차나 다과를 즐기며 수다를 떨던 닌자들이 하나 둘 떠났다. 임무라든지 지루한 보고서 작성같은 것을 하기 위해. 어느새 휴게실엔 나와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그, 둘만이 남았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가 책을 읽듯이, 나는 그를 읽어내고 싶었는지도.

어느 순간, 복면으로 가려진 그의 입술이 작게 옴죽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익숙한, 낮잠에 빠진 것 같은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은 여전히 책에 박혀 있는채로, ‘점심 뭐 먹을까?’ 같은 아주 평범한 질문을 하듯이 무심코 던지는 질문.


「요즘 뭐하고 다니는 거냐.」


필시 둔한‘척’ 하는 거다, 이 사람은. 그의 질문을 듣자, 그때까지 들었던 의문에 확신에 찬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토록 예리하지 않은가? 이런 사람이 바로 옆에서 하는 이야기도 못알아 듣고 언제나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신입 암부녀석 하나 못알아 볼리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모른다고 할지라도 분명 알고 있다. 내가 어딘가 변했다는 것을, 평소같지 않으며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묻는 질문이다. 처음부터 이 공간에 둘만 남기를 기다렸던 거다.

그리고 ‘정확한’ 이야기는ㅡ

그랬다.

난 그 무렵 나뭇잎 마을과 일족 사이에서 이중스파이 짓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한테는 뭘 숨길 수가 없겠군.」

「나라고 알고 싶어서 아는 건 아니야. 나랑 환상의 콤비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임무를 같이하게 만든 사람을 원망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바로 판단이 서질 않아 나는 엉뚱하고 바보같은 질문을 던졌다.


「환상의 콤비로 불리는게, 단순히 같이 한 임무가 많기 때문이란 건가?」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

「곤란한 거면 대답 안해도 돼. 좀… 신경 쓰였을 뿐이니까.」


눈치 빠르게도 나의 곤란함을 알고 그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좀 신경쓰였을 뿐이라고 말하던 그는, 이야기를 시작한 후로는 책장을 전혀 넘기지도 않았고 시선은 계속 같은 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난 갑자기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물론 동정을 바라는 것도 위로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때 그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에게 알렸을지 모른다. 실제로 내 상황이 변해감에 따라 마음에 걸리는 건 언제나 임무를 같이 해왔던 그였으니까.


「일족과 마을 사이의 이중스파이. 그게 다야.」

「마을을 택했군.」

「…………」


이전까지는 이중스파이는 커녕, 스파이라고도 말한 적이 없었다. ‘일족과 마을 사이의 이중스파이’. 결국 방향성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나의 대답에, 그는 바로 마을을 택했음을 알아챘다. 결국 내가 스파이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굳이 그 사실을 내게 알려오고 있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조심하라는 경고였을까. 단지 항상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리고 싶었던 걸까. 결국 우리가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를 예감한 것이었을까.


「임무엔 지장 없는거지?」

「…그래.」

「다행이군. 내일 늦지 마.」


탁, 하고 책을 덮는 소리와 함께 그가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는 알아채기 힘들정도로 옅게 웃고 있었다. 임무는 지금까지처럼 계속 될 거란 말에 다행이라 말하며 웃은 건지, 내 정체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을테니 안심하라는 웃음이었는지 그런건 알지 못했다. 그저 이상하게 가슴한쪽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서 그 곳을 빠져나왔다.

한동안 나의 생활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정신적으로는 점점 힘들어져 갔지만 암부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그대로였다. 그와 나는 많은 임무를 같이 했지만, 임무중에는 서로 평소보다 더 말이 없었다. 환상의 콤비라는 낯간지러운 별명까지 붙었음에도 사실 우린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미건조한 관계였다. 우리는 시시각각 처하는 상황에서 굳이 서로에게 지시하거나 의견을 나누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았고, 서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완벽하게 잘 해낼뿐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고 그 ‘실력’엔 거추장스러운 의사소통 없이도 모든 톱니바퀴가 잘 맞물리게 일을 끌어나가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콤비’란 호칭을 불러온 것이지만.

표면적으로 변한 것 없이 지내던 것도 잠시, 호카게를 비롯한 마을 수뇌부에서 내 임무를 줄이기 시작했다. 임무는 현저하게 줄었는데도 나는 더 바빠지기만 했다. 아무도 모르게 모든 것에서 정을 떼어버려야 했고 모든 것을 정리해야만 했다. 내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정신없이 흘러가기만 하고 있었고 나는 내가 어디 서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 날들이 계속될수록, 나는 한가지 사실을 뚜렷하게 깨달았다. 이중스파이로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임무때문에 그토록 바쁠때ㅡ 그 숨막히는 순간들에조차 내가 그를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고 얼마나 신경쓰고 있었는지. 정신없는 나날들 속에서 그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때서야 알아챘던 것이다.

태양의 높이와 구름의 유무, 바람의 강약에 따라 다채롭게 빛을 발하던 그의 멋진 은발. 시시각각 아주 작은 빛의 변화도 놓치지 않고 반영하며 다양한 색을 내던 그 머리카락이 바람에 기분좋게 한들거리면, 그 사이로 볼 수 있었던 무심한 검은 눈동자와, 이따금 볼 수 있는 나와 같은 붉은 눈동자. 하얗고 지독히도 민감해 보이는 피부. 왼쪽눈을 가로지르며 새겨진 흉터를 조금 자세히 볼 수 있겠다 싶으면, 금방 서클렛을 다시 내려버리던 섬세한 손짓. 어떤 생각에 깊이 잠기면 짓던 표정. 그러다가 짐짓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오면 멋쩍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짓던 미소.

나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그 시기에, 난 간혹 그런 것들을 떠올렸다. 단지 그랬을 뿐이었다. 그것이 나의 결심을 바꾸지도 못했고 제 3의 길을 찾는 모험을 하게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그 날이 다가오자, 나는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그를 찾았다. 사실을, 계획을 말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은 없었다. 그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특별한 반응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었다는 듯이.


「……이게 내가 내린 결정이야. 이틀 뒤다.」

「…그렇군.」


표정없는 그의 검은 눈동자엔 붉은 노을이 가득 담겨 있었다. 타는 듯한 노을은 우치하 일족의 업보-사륜안-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아하지 않았다. 태양이 피를 토하듯 그 붉은 빛을 쏟아내며 저물어가는 것이 멸망해가는 일족을 떠오르게 했다.

그러나 그날 그의 눈에 담긴 핏빛 노을은ㅡ 모든 것을 달라보이게 했다. 붉은 은빛을 내는 그의 머리카락과 태양빛을 그대로 칠해놓은 것 같던 뺨, 흔들림없던 눈동자, 자연스럽게 다물어져 있던 입술… 노을은 일족의 업보를 상징하는 것따위가 아니라, 오직 그를 위해 자연이 준비한 선물같았다.

많은 날을 함께 했었기 때문인지 나는 문득, 그런 그를 남겨두고 먼 길을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일텐데도, 그 순간만큼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듯 해서ㅡ 나조차 몰랐던 내 안의 감정에까지 노을이 번져 오는 것 같았다. 멍하니 있으면 그대로 빨갛게 타 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당신한텐… 미안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뭐가 미안한 건지도 정말 미안하긴 한 것인지도 몰랐다. 굳이 이유를 말한다면, 노을 탓이었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던 태양이 그를 보고 눈물이라도 흘릴 것만 같아서였다.


「괜찮아.」


그는 웃었다. 특유의 그 상냥한 미소는 너무 붉어서 온통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련하면서도 아름다워 다가가고 싶지만, 타버릴 듯 강렬하기도 해서 결코 만질 수 없는 저무는 태양처럼… 그는 웃고 있었다.

바람이 그를 지나치면 은색의 머리카락이 노을빛으로 반짝였다. 마치 피에 젖은 것처럼. 그리고 그 빛은 내가 그에게서 보아왔던 어떤 색깔보다도 강렬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잠시라도 눈을 돌리면 그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ㅡ 다시는 기억조차 해내지 못할 것 같아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웃음의 여운이 남은 눈꼬리는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지만, 눈동자는 쓸쓸한 빛때문인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괜찮아.

나는 그의 대답을 다시 한번 되뇌였다. 타고난 감각으로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 행동, 내 결심같은 것에는 절대로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는 것에 대해서는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듯 그저 괜찮다고 말한다.

ㅡ그래, 당신은 그렇게 평생… 누구도 잡지 않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겠지.

갑자기 조금 억울해졌다. 동시에 피 흘리듯 붉게 서 있는 그를 보고 있으니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내가 그 순간 다 타서 재가 되더라도ㅡ 혹은 그와 같이 피에 물들어 눈을 감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그런 충동이. 너무 뜨거울 것 같아 다가갈 수 조차 없었던 그에게 한발짝 다가갔다.

무언가에 홀린 듯 끌려가서 그렇게 입을 맞췄다. 그는 날 거부하지 않았고 입술은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아마도 나는 그가 가지고 있던 그 붉은 빛에 같이 물들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잊을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현실같지 않던 그 노을이, 그 순간만큼은 우리 두 사람을 집어 삼키고 있었을 거라고.

길지 않았던 입맞춤을 끝내고 입술을 떼자 그는 더욱더 붉게 젖어 있었다. 조금 전에 미소짓고 있었던 그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태양빛이 아니라 정말로 피에 젖어서 그렇게 웃는다 해도 아름답겠지. 나로 인해서 그가 그런 마지막을 맞는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차피 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다음에 볼 땐 적이겠지.」

「그 것 또한 이타치, 네가 선택한거니까.」

「한번쯤 제대로 싸워보고 싶긴 했어.」

「……그래.」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말했어야 하는 걸까? 나는 다음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로 들은 내 이름이 마치 태어나서 처음 들은 내 이름인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피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정도로 새빨갛던 하늘 아래에서 나는 다시 한번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괜찮아’라는 말을 확인해 주듯이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같은 마을의 닌자로서 그를 볼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내가 본 그 마지막 미소는 마치 영정사진이라도 되는 것 처럼 정지된채 내 기억속에 박혔다.

그를 등지고 돌아서자, 그의 눈에 가득 담겨있던 잔인한 노을이 정면으로 내 앞에 펼쳐졌다. 그가 없는 노을은 그저 날 지옥으로 인도하는 신호에 불과했다. 나는 천천히 그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조금 궁금하다. 그가 본 내 뒷모습도 피범벅이 되어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였을까.


.


「결국 이렇게 만나는군, 카카시.」

「그날 이후로 처음인가… 보아하니 잘 지낸 것 같네.」

「당신은 워낙 유명해서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어.」

「………」


불과 조금 전, 다시 몇년만에 재회한 그가 내게 한 말이라고는 결국 단 한마디였다. 내 마지막 말에 그는 대답없이 날 응시하기만 했다. 입을 다물어버린 그는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표정하나 읽기 힘들었다. 여전히 속을 알기 힘든 사람이다.

먼저 공격해 온 것은 그였다. 대화가 끊기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떠난 후 나뭇잎의 닌자였던 시절을 그리워 한적은 없었다. 그를 떠올리거나, 그와 함께 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난 그날 이후로 처음부터 혼자였던 것처럼 잘 지내왔다.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던 그의 명성도 유명한 닌자의 무용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몇번인가 그 날의 입맞춤과 그의 미소를 떠올렸던 적은 있었다. 나답지 않았던 그 충동적인 행동은 온 세상을 피흘리게 만들던 그 노을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저 노을 속에서 붉게 웃던 그의 모습이 슬프도록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아름다운 것에는 누구나 한번쯤 더 눈길을 주듯이, 그 모습을 한번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이다.

그를 사무치게 그리워 했던 건 아니었는데… 초를 다투며 움직이는 그의 모습 하나하나, 다음 동작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보고 싶어서 미쳐가기라도 했던 것처럼, 나는 싸우는 와중에도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눈에 담으려 애썼다.

그의 스피드는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움직임이 유연해서 마치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는 것 같았다. 그에 맞춰 찰랑이는 은발은 때론 너무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보기가 힘들었고ㅡ 창백한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워 보였지만, 닿으면 부드러운 눈처럼 금새 녹아 버릴 것 같았다. 나른해 보이는 눈동자는 언제나 정확하게 내 움직임을 읽고 있었고… 술법을 외울때 복면 아래로 움직이는 입술은, 단 한번 느꼈던 그 감촉을 떠오르게 했다.

함께 했던 임무만큼 우린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그건 몇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였다. 싸움이 시작된지 얼마 가지 않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도, 그도, 서로에 대한 것들을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아주 오랜만인데도 모든 것이 몸에 베어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반응할 수 있었다. 난 그가 좋아하는 공격패턴과 움직임을 알고 있있고 그 또한 마찬가지다. 우린 서로 몇 수 앞을 내다보며 계속 부딪혔지만 좀처럼 승부는 나지 않았다.


「만화경 사륜안을 개안했다 들었는데. 왜 쓰지 않지?」

「금방 지쳐버리거든. 난 우치하가 아니니까.」

「…현명하군. 당신다워.」


그는 동술을 쓰지 않았을 뿐더러 내게 사륜안을 쓸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를 끊임없이 쫓던 나와는 달리 그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완벽하게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눈이 아닌 다른 것으로 거는 암시나 환술같은 얄팍한 수는 통하지도 않았다.

싸움은 길어지고 그는 눈에 띄게 지쳐갔다. 나 또한 그를 상대하느라 한계에 다다랐다. 어느 한쪽이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거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끝’을 내려면 결국 사륜안을 써야 한다는 것도. 결판을 내기 위해 그를 더욱 몰아붙여야 했다. 만화경 사륜안을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 다음엔?

어차피 한쪽이 죽어야 한다면 내 손으로 그를 죽이고 싶었다. 몇 년만에 다시 만난 지금, 암부시절 보았던 그의 모습들을 다시금 눈에 담을 수 있었지만ㅡ 그 날의, 그 피에 젖은 듯했던 미소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쉽게 허락할 그가 아니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호각인 이 싸움에서 결국 죽는 건 나일 수도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공을 들인 끝에, 아주 잠깐이지만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미 그의 동술에 대비한 다음 수도 계산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나는 일부러 정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ㅡ이렇게 되면 분명 당신은 만화경 사륜안을 쓰겠지… 아니면 죽을테니까.


그가 만화경 사륜안을 쓰면, 그때부터 진짜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런데 왜…




ㅡ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야 당신은? 왜 그 눈을 쓰지 않는 거지?


따뜻하고 붉은 덩어리들이 진득하게 내 두손을 적셨다. 이제 막 벌어진 상처에서 터져나오는 피는 타버릴 듯이 뜨거워서,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바닥에 주저 앉아 쓰러진 그를 두 팔 가득 안았다. 그의 피가 내 가슴까지 번져왔다.

그는 붉게 물들었다.
하얗던 피부도 은빛 찬란하던 머리카락도 나비처럼 움직이던 몸도ㅡ 온통 새빨갛게…
그 날의 노을 빛을 가득 받은 것처럼.


「이게 무슨 짓이야…」


그는 대답대신 쿨럭이며 피를 쏟아냈다. 흠뻑 젖은 채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복면을 끌어 내렸다. 상처에서도 입에서도 피는 끊임없이 흘러나와 지칠줄 모르고 그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그는 불규칙적이고 약하게 숨을 쉬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다량의 출혈로 인해 체온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고 몸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는 다시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언제나 나른하게 풀려 있는 듯 보였던 눈동자는 정말로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던 이색의 두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내 심장 속까지 파고 드는 듯했다. 지금은 노을따위 없는데. 야속할정도로 맑기만 한 하늘인데. 그의 시선이 너무 붉어서 쓸쓸해 보였다.


「널 상대론 별로 쓰고 싶지 않았어… 네가 짊어져야 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 이 사륜안 때문이었으니까…」

「고작 그런 이유때문에 목숨을 포기했다고?」

「아니, 사실은… 그 날 이후로ㅡ

…이렇게 죽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웃었다.

그 붉은 미소를 보자 그 날의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전히, 그때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그는 그 미소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작게 들썩이던 움직임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한낮인데도 그는 미친듯 타오르는 노을을 안고 있다.

…나는 속삭임을 멈춘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은 그때만큼 뜨겁진 않고 혈향으로 가득하다. 입맞춤을 끝내고 눈을 뜨면 그때처럼 그가 노을에 젖은채 웃고 있을 것 같아서, 세상이 저물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핏빛 노을이 또 다시 우리를 집어 삼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ㅡ단지 아름다웠기 때문에 다시 보고 싶은 거라고 생각했어. 난 당신이 만들어내는 가슴이 아릿할 정도의 아름다운 그림이 좋았으니까. 그 날의 그런 미소를 한번 더 보려면… 당신을 죽여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어. 나는 지독한 탐미주의자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오직 하타케 카카시, 당신에 한해서만. 하지만 반드시 다시 보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야. 그냥 기회가 된다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안일한 마음이었어…

그리고 결국 이렇게, 다시 한번 노을같은 당신의 미소를 보았는데…

왜 눈물이 나는거지…?
이제와서 심장이 아파 와…
이렇게 품에 안고 있는데도 벌써 당신이 그리워…

각자의 길을 걸었고, 각자의 삶에 서로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 날로 돌아간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텐데…

결국 우린 서로에게 뭐였을까…?
나는 왜 그 날 당신을 찾아 갔고 왜 당신에게 키스했는지…
당신은 왜 날 받아들였는지…

그건 사랑이었을까.
난 당신을 사랑했던 걸까.
이런 죽음을 택한 당신은 나를…

끝까지 물어보지 못한 이 질문도 같이 묻어둘게…
그날의 핏빛 노을과 당신의 붉은 웃음과 함께ㅡ






-Fin.


2011. 9. 21.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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