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진담(雨中眞談)

 

 

 

흐음…, 그럼 이런 이야기는 어때?

 

지독히 비가 오는 날이었어.
나는 비오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냄새가 올라오거든. 잊고 있던 냄새가. 후각이 예민한 탓에 복면도 쓰기 시작한 건데 말이지. 비가 오면 평소엔 그럭저럭 의식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냄새들이 공기에 가득해져. 눅진한 흙냄새, 그 속에 밴 피 냄새, 어딘가의 시체가 썩는 냄새는 물론……, 축축이 젖은 이파리에서 나는 비린내나 온갖 산 것들의 분비물에서 나는 냄새, 텁텁한 나무 향에 가려져 있던 분뇨의 악취 같은 것들이 온통 감각을 뒤흔들곤 하지.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거기다 비에 젖은 복면은 갑갑하기 그지없거든. 그렇다고 벗을 수도 없는데. 벗으면 숨 쉬기가 더 버거워지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아? 근데 비 오는 날엔 그래.

 

맑은 날? 뭐, 그건 좋아하는 편이지.
새파란 하늘에 그림처럼 박혀 있는 태양이 내리비추는 날. 그런 날은 축축한 이끼가 낀 바위, 그 아래 잠든 뼈와 살 찌꺼기들, 부러진 채 썩어가는 나뭇가지의 단면, 구석진 덤불 속에서 조용히 숨지는 생명의 허덕임 같은 것엔 짙은 그림자가 지니까. 너무 짙어서 냄새로도 보이지 않아. 빛이 강할수록 그건 그림자라기보다 어둠 그 자체에 가까워지고, 종국엔 세상에서 완전히 도려내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지. 그런 때 하늘을 보면, 때맞춰 청명함을 가르던 새의 지저귐이 긴 궤적을 쏟아 내려. 마치 누군가 의도하기라도 한 듯. 그 무취의 속삭임은 듣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질 때가 있어. 꼭 모두 네 착각이었다고, 다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듯해서…….

 

아무튼 지독히 비가 오는 날이었어.
바람 한 점 없이 빗줄기가 온 세상을 찢으며 수직으로 내리꽂는 날. 태양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어김없이 고개를 들었고, 난 너무 어지러웠어. 찢긴 틈을 비집고 오른 온갖 냄새들이 사방에서 몸을 옥죄는 것 같았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그게 유독 심한 날이었어. 흐릿해진 세상이 토해내는 악취는 쉼 없이 내 등을 떠밀어 어디론가 몰아내는데, 동시에 그 불쾌한 공기를 아무리 헤엄쳐 나가도 벗어나지 못할 아득함이……. 숨을 들이쉬는 것도 내쉬는 것도 힘겨웠어. 결국 도망치듯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지.

 

정처 없이…… 정신도 없이 헤매다 닿은 곳이 위령비였어.
아아, 알고 있어. 굳이 냄새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평소에도 자주 찾던 곳이라는 것쯤은. 순전히 습관적이었다 해도 맞을 거다. 하지만 ‘냄새’에 있어서 그나마 나은 곳인 것도 사실이지. 흙냄새도 분명 괴롭지만, 사람 냄새에 비할 바는 아니거든. 비 오는 날 사람들에게서 나는 비린내는 정말 견디기 힘들어. 이상한 찌꺼기 같은……, 겨우 덮여 있던 한 꺼풀의 비늘이 다 긁혀 드러난 생살의 고름 내, 뼛속 깊이 밴 시체의……. 마치 썩은 생선을 통째로 삼킨 것 같다고 할까. 물론 내 자신도 예외는 아니고.

 

그저 한참을 서 있었어. 빗결에 흔들리는 풀내음, 그 밑에 꿈틀거리는 벌레 냄새, 연습용 짚인형의 떨어진 팔 다리와 여기 저기 조각나 박힌 쇳덩이 같은 걸 맡으면서. 그것들에도 가려지지 않는 내 체취를 메스꺼워 하면서. 이런 날 오기엔 가장 끔찍한 장소였다고, 뒤늦게 깨달으면서…….

 

한낮인데도 세상이 흐릿했거든. 녹음은 그림자를 몇 번이고 덧칠해 누른 듯 했고, 형체도 없는 희끄무레한 것들이 답답하게 머리를 덮고 있었지. 그리고…… 그 안에 하늘만큼이나 어둑한 비석이 묻혀 있었어. 빗물을 비늘처럼 뒤집어쓴 채, 어느 때보다 칙칙하고 형형하게…….

 

알고 있어? 경계를 잃어버린 빛과 그림자는 아무 것도 감춰주지 못해. 난 항상 그게 참담하다 느꼈지.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어. 음습하게 살아서 펄떡이는 조형을 보며 생각했지. 무엇도 가릴 수 없다니, 비 오는 날은 역시 끔찍하다고……. 아마 그때쯤이었을 거다. 그날따라 유난히 음영이 짙던 이름을 눈에 새기고, 도망치듯 뒤돌아 나온 건.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어떤 아이를 만났어.
대번에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서는 날 가만히 들여다보더군. 아마도 내가 지친 표정을 하고 있어서였겠지. 어쩌면 기묘한 생기가 돌았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상하지, 어차피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아아 그래, 단순히 우산도 없이 흠뻑 젖어 있어서였는지도. 그날의 지독한 비를 온통 뒤집어 쓴 나는 분명, 무덤조차 되지 못한 돌덩이 같았을 거라 생각하니까.

 

그래서였을까……. 난 창백한 아이의 까만 동공 속에 언뜻 비치는 호기심을 보았어. 그 아이는 이제 한창 감정을 배우는 중이니, 이해 못 할 반응은 아니었지. 사람의 말과 표정, 행동에서 감정적 표지를 읽는 법을 연습하는 거야. 어릴 때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간단한 농담이나 말 이면의 진의 같은 걸 파악하기 힘들어 하거든. 그날도 관련 책들을 비에 젖지 않도록 품에 안고 있었어. 그 아이에게 나를 만난 건 배운 걸 시험해 볼 좋은 기회로 여겨졌을 거다. 날 걱정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이지.

 

난 별로 놀라진 않았어. 그 아인 평소에도 종종 그런 눈빛이었거든. 제일 풀기 힘든 난제를 앞에 둔 학생처럼, 약간의 기대와 두려움으로 떨리는 시선을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지. 내가 언제나 복면을 하고 있기 때문인 탓이 클 거야. 표정을 읽어내기 힘드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진심인지 거짓인지 몇 번이고 뒤집으며 생각해 보는 거지. 그걸 알아낼 수만 있다면, 자신의 문제는 전부 해결될 것처럼. 뭐, 난 그 아이의 어설프지만 순수한 해석이 실은 꽤 잘 맞는다고 느껴왔었지만.

 

그래서인지 이상한 장난기가 돋더군. 단순한 변덕이었는지 몰라. 우연찮게 맞닥뜨린 상항에, 내게도 일종의 기대감이 피어났었던 것 같아. 이 아이가 어디까지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물끄러미…… 뿌옇게 회칠한 듯한 공기 속에 유독 또렷이 떠오른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어. 아이는 괜찮으냐고 말없이 내게 묻고 있었지. 무구하고도 다난한 표정으로.

 

잠시간 고민했어. 이왕 든 변덕스러운 기분을 정말 시험해 볼까… 말까, 하고. 어떤 말을 해야 이 아이가 곤란한 표정을 지을까. 아니,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까. 가려진 얼굴은 말과 반대라고 생각할까, 같다고 여길까. 얼굴을 숨긴 채로는 숨기는 말을 해야 솔직한 것인가? 가면 같은 얼굴로 내뱉는 진심은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여질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긴 이 아이에겐 어떤 말을 해도 어느 쪽 반응이든 다 하겠지. 난제를 풀어가듯이. 그렇다면 뭐든 상관없는 것 아닌가…….

 

결국 웃으며 괜찮다는 말이 하고 싶어지더군.
하지만 곧바로 내뱉어지진 않았어. 웃음이라니……. 그렇게 의뭉스럽고 음침한 게 또 있을까. 사실 절로 나는 웃음은 편하지만 믿을 수 없고, 웃고 싶지 않을 때 나오는 웃음이야말로 불쾌해도 신뢰할 수는 있는 법이거든. 그래서 나는 그때 내가 웃고 싶은지, 웃고 싶지 않는지부터 판단해야 했어. 아이의 반응이 어떻든, 내 자신이 무얼 말하는 건지는 알아야 장난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 헌데 그것조차 쉽지 않더군. 웃음이란 거, 생각할수록 냄새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말이야…….

 

웃고 싶은 때란 언제일까. 내가 웃고 싶다면 그건 무언가에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감추고 싶어서가 아닐까. 인정할 수 없거나, 피하고 싶어서. 혹은 그렇게 비틀어야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어서. 내게 웃음이란 건 고작 그 정도 의미이지 않았나. 그렇다면 사실 웃고 싶지 않은 것 아닌가?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을 웃음으로 포장하는 것뿐. 반대로 웃고 싶지 않은 때는 가려져 있던 진실을 마주했을 때지. 하지만 그런 때야말로 웃어야 하지 않나?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문득 발견한 순간에야말로……. 그런데 왜 웃을 수 없게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진실을 왜 보지 못했던 거지? 진실이란 게 본래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고 불변하는 어떤 것이라면,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결국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더군. 아마도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겠지, 무언가가 시야를 가리고 나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원점이었어.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였지. 내가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건, 비교 가능한 ‘거짓’이 있다는 의미니까. 우습지 않아? 진실을 마주하는 건 결국, 내가 이미 기만당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뿐이라는 게.

 

……웃고 싶은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구분하는 것이 처음부터 가능한 걸까? 내가 웃은 적이 있던가. 지금껏 어떤 기분으로 웃었던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니 조금 머리가 아프더군.


 

의도치 않게 길어진 침묵 속에서 아이가 카카시 씨? 하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어. 그 눈을 보니 이런 아이를 앞에 두고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던 내가 좀 우스워지더라고. 나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고 있는 녀석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그래서 웃었어.
괜찮아, 말을 건넨 것도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아. 정말 기절하기 일보직전이 되어버렸거든. 바보같이, 웃으면서 그만 공기를 가득 들이켠 바람에. 그때껏 숨을 멎다시피 쉬고 있던 게 다 허사였지. 역한 냄새들에 불시에 공격당한 기분은 정말이지 끔찍했어.

 

아이를 살피기는커녕 서 있을 여력조차 없어진 나는 그대로 집으로 되돌아왔어. 거울을 지나치는 내 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형편없었지만, 제대로 신경 쓰기엔 너무 어지러워서……. 비뚜름하게 놓여 있던 의자에 그냥 앉았어. 그 후로는 마치 내가 잠시 사라졌던 것 같아. 신체를 의식할 수 있는 긴장이 모두 빠져버린 채로 한참을 있었지. 한참…… 어쩌면 순간일지도. 얼마큼인지 감각이 불분명한 시간이, 우두커니 앉은 나는 제쳐두고 흘러갔어.

 

사실 그런 시간은 내게 종종 찾아와. 정적… 그리고 또 정적……. 공기 중을 떠도는,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산 것이 뿜어내는 악취. 소음이라곤 예민한 코끝에서 퍼지는 미약한 숨소리. 혐오하기도 지친 그 호흡……. 젖은 옷도 달라붙은 복면도 사라진 피부의 감각. 아무런 의미도 없이 솔아버린 시야. 적응하지 않은 오감조차 침잠하고 마침내 텅 빈. 죽은 돌덩이처럼 박제된 시간. 없어진 신체 위로 끝없이 쏟아지는 내리지도 그치지도 않는 비…….


 

아이의 반응을 보면 내가 어렵사리 보냈던 표지가 닿지 않은 게 분명했어. 내 표정이 말과는 달랐던 거겠지. 아니, 같았기 때문에 복면을 덧쓴 거짓말이 되었던 걸까. 그 아이는 나의 대답을 믿었던 건지, 믿지 않았던 건지. 흠…… 역시 이것만큼은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네. 하긴 그런 꼴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어떤 대답이든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아아, 반응이란 건 갑자기 난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말한 거다. 처음엔 잘못 들었다 생각해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어. 먼 빗소리에 적막한 방을 가르는 이명이, 처음 듣는 소리도 아닌데 낯설기만 했지. 그런데 두 번 세 번, 끈질기게 소리가 반복되고 인기척까지 드니 더는 무시할 수가 없더군.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어. 들여다보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지. 아이는 그걸로 허락이라도 받은 듯 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어. 천천히, 하지만 망설임 없이.

 

팽팽하게 펴진 우산…….
그 살 끝에 시선이 맺혀 떨어지지 않았어. 방에 들어서도 아이는 밖에서 쓰고 있던, 제 술법으로 만든 우산을 그대로 든 채였거든. 걸음마다 후드득 빗물이 추락하고 내게도 튀었어. 이미 물에 잠긴 꼴이었으니 새삼 거슬릴 건 없었지만. 단지 난 조금… 놀랐던 것 같아. 분명 밖에서 들이친 냄새가 지독했을 텐데도,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굳어 있는 사이 아이는 코앞까지 다가서 있었어. 그리고는 내가 어떤 반응을 채 하기도 전에, 들고 있던 우산 손잡이 끝을 젖은 내 손목에 감아주었지……. 단단히 고정해두는 손짓까지 멍히 보다가, 그마저 멀어지고서야 나도 고개를 들었어. 하지만 이미 머리를 덮은 우산 때문에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더군. 살 끝에 맺힌 빗방울, 칙칙한 공기를 머금은 그 비늘조각만 눈에 들어올 뿐.

 

약간의 의아함, 멎어버린 순간 속에서 내 움직임은 매우 더뎠어. 아이의 얼굴을 보려면 우산을 접든지, 치우든지 해야 했는데. 어물거리는 사이 아이는 금세 사라져버리고 말았어. 우산 너머로 한마디만 남겨놓고는.

 

그 후? 어떻게 하긴, 그냥 그렇게 앉아 있었지. 우산을 쓴 채로 가만히. 그려내 만든 그 우산은 말 그대로 그림 같았어. 새파란 하늘에 박혀 있는 태양처럼. 동시에 끝에 맺힌 물기는 미끈하고 역겨울 뿐, 색을 특정할 수 없었지. 정말 오묘한 감각이었어. 공간은 사라지고 평면으로 조각난 시야만이 남은 듯한……. 그렇게 얼마간인지는 모르겠군. 어차피 그런 날은 시간조차 칙칙하게 흐르니까. 다만 아이가 우산 너머로 조용히 남기고 간 말이 계속 맴돌았어. 낯설고도 익숙한 이명처럼.

 

비 맞지 마세요, 카카시 씨.

 

 

 

.

 

 

 

“…….”

 


이야기를 마친 카카시는 잠시 말을 잃은 상대의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녹음이 새파란 하늘을 쪼개듯 가르는 맑은 날이었다. 멀찍이 누군가의 노력만큼 흠집을 잔뜩 간직한 나무 기둥과 짚인형들이 늘어서 있었다. 넓은 공간 한가운데엔 태양빛조차 튕겨낼 듯 쨍한 회색의 비석이 우두커니 섰다. 단단한 조형이 그어낸 그림자가 전에 없이 청명하고 짙다고, 카카시는 무심코 생각했다. 다시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본다.

 


“음,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는 얼굴이군.”

 

“아니, 그보다는…”

 

“글쎄……. 말하자면 이런 거지. 그 전까지 내게 세상은 두 가지 뿐이었거든. 맑은 날, 혹은 비 오는 날. 하지만 그날… 비는커녕 습기도 잘 느껴지지 않는, 외부와 분리된 방에서 그 아이의 우산을 쓰고 있던 내 기분이 어땠을 것 같아?”

 

“…….”

 


제 말을 끊듯이 이어지는 질문에 상대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카카시는 평소보다 말이 많은 편이었다. 이것도 간혹 든다는 변덕이나 장난기 같은 것인지. 하지만 내용은 도저히 장난으로는 보기 힘들다. 의아함과 낯설음이 커져만 가는 가운데, 카카시는 딱히 그런 혼란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라는 듯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나조차 생소해서 표현하긴 힘들지만. 그건 마치… 맑게 비가 비추는 날 한가운데 서 있는, 온 세상을 찢으며 떨어지는 태양 아래서 진한 비 냄새를 맡는 기분이었어…….”

 


잠시 시선을 내려 제 손을 옴죽거리며 말하던 카카시가 고개를 들었다. 가볍고 경쾌한 한숨과 함께 예의 그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안 그래도 속을 읽기 힘든 눈동자가 아예 감춰져버렸다.

 


“뭐 그러니까, 가끔 그날이 떠오르면 생각이 든다는 거야.
어쩌면 모든 순간이, 햇빛이 그치고 빗발이 내리쬐던 그날과 같은 것 아닐까 하는.”

 


미약한 숨처럼 옅은 바람이 카카시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까만 머리만큼 새까만 소년의 눈동자도 꼭 그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먼저 시간을 내주길 요청한 건 자신이었다. ‘연습’을 위해서였다. 항상 복면을 쓰고 있기에 더 이 남자를 고른 건 맞다. 하지만 매우 가벼운 마음이었다. 특정 주제로 카카시가 간단히 말을 던지면 자신은 그 순간의 표정이나 억양, 제스처를 관찰하려던 정도였는데. 어느새 본연의 목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상한 흐름이 되었다. 스스로 결론 비슷한 걸 지은 카카시는 더 이상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길어지는 공백에 제가 말할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소년이, 아까부터 가장 하고 싶던 질문을 꺼냈다.

 


“그러니까 카카시 씨…, 그건 제 이야기잖아요.
왜 지금 그 얘길 하시는 겁니까?”

 


오늘 이 만남이 시작된 이후로 카카시에게 가장 큰 표정 변화가 일었다. 동그랗게 뜬 놀란 눈동자가 잠시간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너야말로 이럴 줄은 몰랐는데, 굉장히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라는 태도였다. 곧 여상하게 눈썹을 내려뜨린 카카시가 조용히 반문했다.

 


“사이, 네가 ‘거짓말’ 해보라며……?”

 


구름 한 점 없이 유유자적한 새가 깨끗한 궤적을 긋는다. 눈부신 쪽빛 하늘이 무어라 속삭이는 것만 같다. 눈앞의 남자 위로 나무 그림자가 우산처럼 드리워졌다. 원래는 흐리터분한 색의 머리칼이 짙게 내려앉았다. 결국엔 그림자라기보다 새까맣게 잘려나간 어둠이었다. 빛과 어둠의 첨예한 경계가 남자의 얼굴 위에서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복면이 만들어낸 은폐의 선과 한데 얽힌다. 남자는 전에 없이 분명한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표정이 없는 건지, 슬픈 건지,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연한 바람이 한차례 분다. 우산 같은 나뭇가지 끝에서 축축이 젖은 이파리 하나가 추락한다. 남자의 머리 위, 도려내진 어둠에서도 파편이 떨어진다. 번들거리고 비릿한 비늘 조각이었다. 순간 소년은 또렷하게 그어진 경계들이 흐릿해 보였다. 아무 것도 가려주지 못하는 속에서 시야가 어지럽다. 남자의 표정은 웃고 있는듯도 했다. 소년은 문득 자신을 덮치는 역한 감각에 숨을 멈추었다. 지독한 악취였다.

 

 

 

 

 

 

 

- fin.

 

 

 

 

 

 

 

 

 

 

 

2018. 11. 26.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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