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림 - #4.



ㅡ빌어먹을…

오늘같은 날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차를 회사에 두고 왔을까. 카카시는 자신의 멍청함이 기가막혀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터벅거리며 다리를 움직일때마다 느껴지는 매일 딛고 다니는 땅바닥이 이렇게 생경할 수가 없었다. 처음 와본 낯선 세상에서 걷고 있는 것 같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는데도 밝은 빛을 뿜어대는 거리와 끊임없이 스쳐지나가는 자동차들. 카카시는 세상에서 혼자만 분리된 기분이 들었다. 감정은 지나치게 예민했지만 시야는 몽롱했다.

계속해서 목이 조여오던 느낌이, 아스마의 집을 나서자마자 울음으로 터질 줄 알았건만 의외로 눈가는 조용했다. 목은 그대로 잠겨서 어딘가 심연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 목소리를 잃은 공주처럼 누군가 말을 걸더라도 입만 벙긋거리게 될 것같은 느낌이다. 멀쩡한 남자가 길거리에서 울고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ㅡ 카카시는 분명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며 카카시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꼭 한번씩은 흘끔거리며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경계의 얼굴로, 때로는 걱정스러움이 담긴 표정으로, 때로는 동정의 눈빛으로. 하지만 그런 시선들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손에 들려있는 청첩장을 내려다 보았다. 정말이지 처치곤란이다. 몇번이고 구겨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왜인지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카카시는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엔 카드를 열어보았다. 겉에 새겨져 있던 음각의 무늬가 금빛으로 똑같이 프린팅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화려한 모양과는 다르게 메시지는 간단한 편이었다. 아스마와 쿠레나이의 이름, 시간과 장소ㅡ 그리고 당신의 축하를 받고 싶으니 꼭 와달라는 웃기지도 않는 문장. 결혼식은 불과 한달 뒤였다.

결국 버리지는 못했지만 소중하게 다뤄줄 마음도 없다는 듯, 카카시는 청첩장을 대충 두어번 포개접어서 수트 앞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당장이라도 흡입하지 않으면 고꾸라져버릴 약물중독차처럼 힘겹게 바튼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서야 알았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정신을 놓아버릴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날카롭게 정제되어 있는 초첨을 일부러 흐뜨려버릴 수 있다는 것을. 제3자가 보기엔 술에라도 취한 것처럼 보일테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면 진짜로 미쳐버릴테니까.

눈부실 정도로 밝은 편의점 간판을 보고 카카시는 뛰어들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한번도 들어와본 적이 없어 낯선 구조속을 헤매다가 다소 먼지까지 쌓여 있는 싸구려 위스키병을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잠긴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몸은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이런 걸 마시면 분명 지금보다 더 이상해 보이겠지만, 앞으로 한걸음이라도 더 내딛기 위해서는 술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계산을 하면서도 술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서 도망치라고, 이 작은 유리병 안에 모든 걸 다 구겨넣고 집어던져 버리라고 누군가 귓가에 대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


저녁내 아무것도 먹지 않은 위의 흡수력은 대단했다. 알콜의 힘을 빌린 몸은 더욱 비틀거렸고 입가는 세상을 조롱이라도 하듯 자꾸 힘없는 조소를 흘려댔다. 그러나 흘러나온 비웃음은 하나같이 킥킥거리며 카카시의 가슴으로 모여들어 심장을 찔러댔다. 아팠다. 카카시는 고작 그런 걸로 아파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서 다시 웃었다. 그럼 또 다시 아프고, 그럼 한번 더 웃고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알콜은 모든 것을 둔하게 만든다. 운동신경, 판단력, 상황에 맞게 기억 속에서 적절한 정보만 꺼내오고ㅡ 나머지는 제어하는 능력. 기억과 정보를 통제하는 능력이 둔해지면 깊은 곳에 묻혀있던 많은 것들이 질서없이 떠오른다. 카카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취해가는 뇌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리되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을 자꾸 의식밖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던 걸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사무실 특유의 답답한 공기에 지쳐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있곤 했던 자신에게 어느새 다가와 말없이 캔커피를 건네고는 제멋대로 머리를 헝클고 지나가던 때였을까. 일 끝나면 술이나 마시러 가자며 자연스럽게 어깨를 감아오던 단단한 팔에서 남자다움을 느꼈던 순간일까. 지독한 골초라고 나무라다가도 문득 쌉쌀한 담배향이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때일까. 혹은 복도 끝 저 멀리에서 시선이 마주쳤을 때 주변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흔들며 큰소리로 ‘여어-’ 하고 시원하게 웃는 모습을 봤을 때일까. 아니면 출근시간 만원인 엘리베이터에 타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팔이 억세게 잡아끌려 결국 좁아터진 공간에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다시피 하고 사무실까지 올라갔던 날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야근 중 불편한 자세로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가 새벽녘에 깨었을때 등 뒤로 덮혀있던 그의 외투를 발견했을 때였을까…

아스마에겐 아무렇지 않았을, 그저 친구로서 해왔을 행동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카카시는 그 작은 일상들에 자각도 하지 못한채 점점 물들어가고 익숙해져버려서ㅡ 어느새 그런 것들을 매일같이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감정의 시작은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카카시의 기억은 좀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오비토의 죽음으로 회사를 쉬었다가 다시 돌아온 후ㅡ 거의 매일같이 아스마와 술을 마시며 위로를 받던 날들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위로가 습관처럼 될 무렵, 그는 쿠레나이와 교제를 시작했고 동시에 카카시와 함께 술을 마시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었다. 모를 일이다. 그때 느꼈던 허전함과 서운함이 이미 사랑이었는지도. 어찌 해볼 겨를도 없이 먼저 죽은 연인을 향한 망연한 마음은, 단지 아스마와 같이 있고 싶다는 진심을 포장하는 핑계로 변했었는지도. 가끔 회사로 찾아오던 쿠레나이와 마주쳤을 때 자신을 덮치던 뜻모를 경계심이 사실은 질투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였는지, 분명한 선을 긋기 힘든 시작과는 다르게 끝은 너무도 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카카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어떤 결정을 해야할지, 아니 무언가 결정을 하긴 해야하는 것인지조차. 하지만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를 감정이 이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채 방황해야 하는 이 와중에도,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ㅡ


“꺅-! 어머, 놀래라! 괜찮으세요?”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때, 고막을 찢을듯한 요란한 소음과 옆을 지나치던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카시는 몇초간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손에 들려있던 위스키병이 떨어져 바닥에서 처참하게 산산조각 나 있었다. 술은 어느새 거의 비워져 있었는지 바닥이 질척하지는 않았다. 카카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무릎을 굽히고 앉아 길 한가운데에 날카롭게 자리잡은 유리조각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술이 비워진 그 병안에, 아직 버려야할 아무것도 넣지 못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같이 산산조각 부숴뜨려 없애 버려야할 어떤 기억도 넣지 못했는데, 모든 감정은 아직 고스란히 남았는데… 카카시는 그나마 기댈 수 있던 작은 공간마저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아무것도 없다.


“읏!”


결국엔 바짝 날을 세운 유리조각에 손을 베었다. 반사적으로 빠르게 손을 떼었지만 검지손가락에선 이미 피가 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랑곳 않고 나머지도 치우려고 손을 뻗는데 괜찮냐고 물은 뒤로 계속 카카시 하는 양을 걱정스레 지켜보던 여자가 결국 한번더 말을 건넸다.


“큰 조각들은 대충 치우셨으니까 그냥 가셔도 될 것 같아요. 어차피 새벽에 길 다 치우니까- 그보다 손부터 지혈하세요. 손수건이라도 드릴까요?”

“괜찮아요. 놀래켜서 죄송합니다.”


조금은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정도인 여자의 친절에 카카시는 애써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회사에 거의 당도해 있었다. 드문드문 불이 켜져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불이 꺼진채 아침을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건물을 향해 터벅터벅 힘겹게 발을 옮겼다.

어두운 주차장으로 발을 들이자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자극해 왔다. 카카시는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무것이나 붙잡고 다 쏟아내고 싶어지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차를 주차해 놓은 곳을 향해 비틀거렸다. 답답한 공기에 아스마의 집에서 지나치게 정성들이며 메었던 넥타이를 거의 풀어내다시피 잡아 당겼지만,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셔츠 단추마저 두어개 끌러내었다. 무관심하게 방치해둔 탓에 손가락에서 계속 흐르고 있었던 피가 새하얀 셔츠에 스며들었다.

아침에 빽빽하게 들어차있던 차들은 거의 사라지고 듬성듬성 불규칙하게 남아있는 차들 사이에서 카카시는 자신이 세워둔 검은 세단을 발견했다. 몇 대씩 옹기종기 모여있는 다른 차들하고는 다르게 유독 혼자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휑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차가 유난히도 외로워 보여서 카카시는 선뜻 올라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울렁이는 속때문에 배를 움켜잡고 차 옆 기둥에 대충 아무렇게나 기대어 앉았다. 크게 한숨을 쉬어 보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술병을 깨는 바람에 잠시 날아갔던 생각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음따위 없어도 괜찮다고 했다. 같이 뒹구는 것만으로도 서로 좋지 않겠냐고, 그 외에 바라는 건 없다고, 붙잡을 일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스마에게, 그리고 자신에게ㅡ 그렇게 거짓말 해왔다. 카카시는 이제 애써 자신을 속여오던 것과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관계였고, 시작한 것은 본인이면서도 왜 이렇게 괴로워 하고 있는가. 답은 간단했다.

사실은 기대했었다. 서로 살을 맞대다 보면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지금까지 친구로서 지내온 시간이 앞으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믿었다. 관계를 가지면서 좋아하는 마음이 눈꼽만큼도 들지 않을 수는 없을 거라고. 사실 어느정도 마음이 있으니까 몸을 섞을 수 있는 것일 거라고. 바라고 또 바랐다. 변함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이 언젠가는 자신과 같아지기를… 너무도 간절히 바라왔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그때가서 실망하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말자고 끊임없이 자신을 타이르면서도ㅡ 아스마의 손짓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찾고 혹시 내가 원했던 것일까, 생각하며 두근거려 하는 시간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었다.

몸을 대가로 마음을 기대했었던 거다, 바보처럼.
카카시는 대로 한복판에 벌거벗고 서있는 것처럼 갑자기 수치심이 몰려왔다.

ㅡ누가 지금의 나를 보면 정말 한심하고 더러워 보이겠지.

작게 실소를 터뜨리는 찰나, 누군가 덥썩 카카시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카카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힘없이 쳐져있던 눈커풀을 들어올렸다. 흐릿한 시야로 어느새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어깨를 흔드는 인영이 들어왔다. 알콜로 인해 둔해진 뇌로 느릿하게 정보가 흘러들어온다. 짧고 까만 머리, 커다랗고 까만 눈에 심각한 표정을 짓는 일은 좀처럼 없는 듯한 얼굴.


“카카시 선배…? 왜 여기 이러고 계세요?”

“응, 텐조…”

“선배, 술 마셨어요?”

“조금…”


갑작스런 텐조의 등장으로 조금 뚜렷하게 정신이 든 카카시는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미 취한 몸은 말을 듣지 않고 휘청거렸다. 가만히 앉아있는 동안 더욱 취기가 오른 것이었다. 텐조는 순발력있게 그런 카카시를 팔을 둘러 안았다. 중심을 잃고 안겨오는 몸에서 독한 술냄새가 풍겼다. 얼마나 마신걸까. 텐조는 그 자유분방하고 치기어린 대학생일 때에도 카카시가 이렇게 몸도 못가눌 정도로 취해 있는 것은 본적이 없었다. 


“선배, 선배가 무슨 술을 이렇게…”

“그냥 좀… 난 괜찮으니까 이렇게 잡지 않아도…”


카카시는 텐조의 어깨를 밀어내며 많이 취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똑바로 서려고 했지만, 텐조에겐 오히려 서 있기도 힘들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흔들리는 시야로 텐조의 얼굴을 정확히 보기 위해 초점을 맞추던 카카시는 순간 땅이 빙 도는 듯한 어지러움에 다시 주저앉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가락에서 나는 혈향에 속이 울렁거린다. 


“선배 손에서 피나요!”

“응, 그렇네…”


카카시는 작게 중얼거리며, 흘러내린 모양 그대로 굳어가고 있는 핏자국을 마치 남의 손가락을 보는 듯한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통각마저 둔해진 탓에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다. 상처받은 마음도 이렇게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카카시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네’ 라뇨, 어휴 정말… 어디 좀 봐요!”


혼자 남아 서류정리를 한 탓에 퇴근이 늦어졌던 텐조는 예상치 못하게 주차장에서 카카시를 발견했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지만, 전에 본데없이 취한 모습에 상처까지 나 있는 걸 보고 어느새 속상한 마음이 훨신 커져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엉망인 모습을 하고 있는건지. 이런건 텐조가 아는 카카시도 아니었고, 텐조가 보고 싶어했던 모습도 아니었다.

카카시 앞에 구부리고 앉아서 손을 낚아챈 텐조는 상처를 들여다 보았지만 어두침침한 지하주차장의 조명과 전혀 닦이지 않은채 굳어가는 피때문에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에 텐조는 무심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아앗…”


거부할 기운도 없어 눈을 감은채 기대어 앉아 텐조가 하는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던 카카시는, 텐조가 상처부위의 피를 핥아내자 따가움에 움찔거리며 얕게 신음을 흘렸다. 텐조는 순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걱정되는 마음에 깊이 생각해볼 새 없이 상처를 핥았던 것이지만, 카카시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문득 자신의 행동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민망하고 머쓱해져 괜히 카카시의 눈치를 보며 얼른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하얗고 긴 손가락에 상처를 따라 다시 피가 조금 베어 나오고 있었다. 어디서 다친건지 불규칙하게 찢어지다시피 베인 상처가 꽤나 아플 것 같아서 좀처럼 걱정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치료를 해줄 수 있는 어떤 것도 없고, 피는 거의 멈춰 있었기에 텐조는 상처는 일단 제쳐두고 다시 카카시를 바라보았다. 조금 상기되었지만 지친 듯 힘없이 풀려있는 표정속에 괴로움이 엿보였다. 회사에서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넥타이며 셔츠가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져 있고, 손에서 옮겨간 듯한 피까지 묻어 있었다. 앞섶이 드러나 하얗고 긴 목과 쇄골선이 텐조의 눈에 들어왔다. 그새 새로 생긴듯한 붉은 자국들을 지나칠래야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저녁에 누군지 모를 그 애인을 또 만난걸까, 그 사람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전의 흔적들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이렇게 관계를 가질정도로 좋은 사이라면 뭣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거지? 직접 물어볼 수는 없는 수많은 의문들이 텐조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텐조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살짝 숨이 가쁜듯이 색색거리고 있는 카카시를 향해 물었다. 


“선배, 무슨 일 있었어요?”


ㅡ무슨… 일?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까칠해.’

카카시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텐조의 말을 듣자, 그 물음이 아스마의 목소리로 덧씌워지면서 낮에 자신과 이야기 하던 아스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오늘 낮에 들었던 말인데도 몇년이나 흐른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참으로 이상했다. 펑펑 울어도 속이 시원찮을 판에 아스마의 집을 나선 후에도 청승맞게 옛날 기억들만 떠오를 뿐 눈물 한방울 나지 않았는데,

ㅡ나도 모르겠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안타깝게 물어오는 텐조의 목소리를 듣자 거짓말처럼 뜨거운 눈물이 눈에서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숨기거나 수습할 새도 없이 흘러 넘치는 눈물때문에 손을 눈가로 가져가자 눈물이 손등을 타고 내려온다. 그 느낌에 눈물이 나고 있다, 라는 걸 더욱 실감해버린 카카시는 무슨 신호라도 받은 듯이 서럽게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윽, … 흑…”

“서, 선배…”


자신의 물음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카카시때문에 텐조는 적잖이 당황했다. 가슴 속에서부터 끊어질 듯 꺾여 나오는 그 서러운 울음에 더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도 없고,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텐조는 한동안 어찌할 줄을 몰라 머뭇거리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애처롭게 들썩이는 카카시의 어깨를 안았다. 밀어내면 고집 부리지 않고 그냥 물러날 생각이었지만 카카시는 가만히 있었다. 그에 좀 더 용기를 얻은 텐조는 가만히 카카시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곧 텐조의 어깨도 뜨겁게 젖어 들었다.

카카시는 그토록 울어야 할 곳이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취해서 정신없는 와중이라 아무것도 재고 생각해볼 여지조차 없는 것인지도 모른채 텐조의 어깨에 기대서 그칠 줄 모르고 흐느꼈다. 붕붕 울려대는 머릿속에서 규칙없이 떠오르는 아스마의 잔상들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그 눈물에는 방심하고 있으면 어느새 멋대로 팔을 잡아당기거나 머리를 헝클어 놓아서 가슴 떨리게 만들던 아스마도, 침대에서 농밀한 한숨을 뱉으며 자신을 애무하던 뜨거운 아스마도, 가끔은 자신의 기대를 철저히 무너뜨리던 무심한 표정의 야속한 아스마도, 모두 담겨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만, 진심으로 좋아했다. 부끄럽긴 하지만, 관계를 가지면 마음도 변할 거라고 내심 기대했었다. 그랬었는데… 카카시는 이 비정상적인 관계의 끝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단 한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가슴이 쥐어짜지는 듯한, 숨도 못쉴 정도로 괴로운 울음이 제대로 뱉어지지도 못한 채 목 안에서 몸부림 친다.

이건 슬프기때문에 나는 눈물도 실연의 아픔때문에 나는 눈물도 아니었다. 단 한가지, 이렇게까지 지내왔음에도 아스마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비참함때문에 나는, 자신의 무력함을 뼛속 깊이 실감하면서 나는ㅡ 그런 눈물이었다.   






-To be continued




 

2011. 12. 11.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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