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선물이 뭐예요?”

“없어.”

“선배.”

“응?”

“크리스마스에 뭔가 받고 싶은거 없어요?”

“……”


대강대강 대답을 흘리던 카카시는 반복되는 질문에 책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거두었다. 앞에 서 있던 닌자는 고양이 가면의 구멍을 가득 메운 까만 눈을 천진스럽게 꿈뻑거린다. 자신이 이제 막 깊이 빠져들기 시작한 카카시의 독서를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같은 건 전혀 모른다는 듯이. 게다가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마저 품고 있었다. 매번 이렇다. 이제와서 카카시의 대답이 달라질리 없는데도.


“이런 식으로 묻는 이유가 뭐야?”

“음, 그러니까… 그 몇초사이에 생겼을지도 모르잖아요, 받고 싶은 게.”

“그럴리 없잖아.”

“하하, 죄송해요. 하지만 정말 생길 수도 있잖아요. 이제 바로 내일이라 시간도 없고요.”

“하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데. 이 말도 몇번째인지 모르겠군.”

“그러지 마시고- 이제 진지하게 생각 좀 해보는 게 어때요? 선배.”

“그러지 말고 이제 신경 좀 꺼주는 게 어때? 텐조.”


가시 돋힌 마지막 말에서 싸늘한 기운을 느낀 텐조는 순간 움찔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있던 카카시는 더이상 독서를 하고픈 마음이 안드는지 책을 덮고 일어섰다. 그대로 인사조차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갈 것 같은 그 모습에 텐조는 어떻게 입을 떼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그런 텐조를 모를리 없는 카카시는 옮기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하아…’ 날숨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취미생활을 방해받은 것도, 짜증이 나는 것도, 사과를 받아야 하는 것도 카카시 자신인데… 텐조의 이런 모습엔 오히려 어딘가 미안해져 버린다.


‘내가 너무 무른거겠지…’


가면 너머로 잔뜩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을 텐조에게, 카카시는 조금 전보다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잘 쉬고 다음 임무때 봐. 먼저 갈게.”

“네, 선배!”


카카시는 이미 돌아선 자신의 뒷모습에 대고 힘차게 대답하는 텐조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으면서, 말 한마디에 금세 화색이 돈다. 눈에 보일 듯이 표정도 감정도 읽기 쉬운 타입. 적어도 카카시에게 텐조의 가면은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카시는 터벅터벅,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거리에 나왔다. 12월 말의 농익은 찬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온 몸을 구석구석 훑고 지나간다.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카카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복면을 하고 있는데도 온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 같아, 답답해서 벗어두고 온 가면이 새삼 아쉬워진다. 저절로 움츠러드는 목과 주머니 속에서도 꾸욱- 주먹이 쥐어지는 두 손에, 카카시는 걸으면서라도 책을 읽어볼까- 했던 생각은 말끔히 접어버렸다. 하나같이 몇겹이고 할 수 있는만큼 껴입은 채로 잰 걸음을 걷는 사람들 속으로 합류하면서, 카카시는 텐조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선배, 혹시 요즘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갑자기 그런건 왜?」

「아 그게, 특별한 이유는 없고요, 그냥 궁금해서… 하하.」


처음 텐조에게서 그 질문을 받은 것은 12월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카카시는 그 상황에 묘한 이질감과 낯익은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희미해져 있었다. 하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없어.」 

「그래도 잘 생각해 보시면…」

「두가지.」

「네?」

「첫째, 갖고 싶은 것. 둘째, 굳이 너한테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아야 하는 이유. 둘 다 없다고.」


‘아…’하고 탄성도 신음도 되지 못한 소리를 벙찌게 내뱉은 텐조는 실망감에 잔뜩 풀이 죽었다. 카카시가 단번에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 버려서 깜짝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겠다는 계획은 이미 실패. 게다가 대답은 지나치게 분명한 거절이어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금의 틈이라도 남겨 주었다면 좋았을텐데, 카카시는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텐조는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그럼 먼저 가 볼게요…’라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삿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 후 며칠만에 나타나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고서야, 카카시는 텐조가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너무 냉정하게 굴었었나 싶어 평소보다 더 신경써서 안부를 물으려는 찰나, 텐조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뜸 말을 꺼냈다.

ㅡ선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은 게 뭐예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크리스마스 선물임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카카시는 텐조가 영락없이 포기한 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질문을 다시 듣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텐조는 나타나지 않은 그 며칠동안 어떤 큰-거의 오기에 가까운- 결심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뒤로는 틈만 나면 선물에 대한 답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어쩌다 카카시가 진심으로 신경질을 내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의 뻔뻔함은 또 없어서, 카카시는 마음껏 화를 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대강대강 받아 넘겨주는 게 그나마 최선. 그렇게 지내기를 벌써 몇주째… 어느새 크리스마스는 하루 전으로 다가왔고 이제 질문을 연달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좀처럼 다른 닌자들과 어울리는 일이 없는 카카시에게 있어 텐조는 확실히 친한 축에 속했다. 그것도 꼬박꼬박 선배라 칭하며 일방적으로 수도 없는 말들을 쏟아내던 게 결국 이 정도까지 온 것이지만. ‘선후배 사이’라고 하는 텐조의 말이 어색하지 않을만큼 카카시에게도 텐조는 대하기 편한, 자신을 잘 따르는 후배였다. 하지만 ‘선물을 주고 받을 정도의 사이인가?’ 라는 물음에는 ‘아니.’라는 것이 카카시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선물 같은 것은 있다해도 말할 수 없다.

아까보다 소란스러워지고 복작거리는 느낌에 카카시는 다시 한번 주의를 주변으로 돌렸다. 어느새 마을 중심가에 도달해 있었다. 매서운 겨울 추위가 이곳에만 닿지 않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조금 모여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외곽쪽의 거리보다는 확실히 따뜻한 느낌이 든다. 곳곳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에는 알알이 전구들이 감겨 빛나고 있고 상점들은 모두 트리나 리스같은 장식들로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심심치않게 들리는 캐롤이나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건네는 들뜬 목소리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확실히 크리스마스는 얼어있는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종교적인 의미는 제쳐두고서라도 낡은 해를 보내는 마지막 축제로 손색없는 모두의 날인 것이다.


‘뭐, 나와는 상관없지만….’


이 거리를 지나야만 집으로 갈 수가 있기에 잠시 풍경을 둘러보던 카카시는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몇걸음이나 걸었을까, 눈 앞을 무언가 스치는 듯 하더니 콧등에 토옥- 내려 앉고는 곧 자취를 감췄다. 카카시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주머니에 꽂혀있던 손을 슬며시 내밀어 보았다. 시선도 닿지 않는 어둠 속 어딘가에서부터 희끗희끗한 점들이 팔랑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눈이 오네’ 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서도 사람들이 눈이 내린다며 기쁨의 탄성을 내기 시작했다.

카카시는 다시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었다. 잊은 줄 알았던 오래전의 기억이 유독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처럼 눈이 내리는, 바로 이 거리였다. 스쳐 지나가며 웃는 사람들과 밝고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혼자만 분리된 듯 쓸쓸하게 걸었던 기억. 차가운 겨울이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자신을 마른 나뭇가지처럼 흔들어대던 날…. 그것은 카카시가 성탄절에 대한 의미를 더이상 가질 수 없게된 첫번째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


카카시는 아무리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도 산타의 존재를 믿었던 때를 찾을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의 어리디 어린 자신도 크리스마스 날마다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두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갖고 싶은게 없냐는 질문을 넌지시 한다는 사실도. 오히려 모른척 대답해 주는 것은-그것마저도 사쿠모가 알고 있었는지는 별개로- 카카시쪽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카카시에게는 다른 아이들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산타를 기다리며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길 이유가 없었다. 성탄절도 다른 수 많은 날들 중 하나일 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도 흥미가 없었다.

ㅡ카카시, 요즘 뭐 갖고 싶은 거 없니?

언제나 특별히 가지고 싶거나 원했던 것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카카시는 아무거나 그럴 듯한 것으로 대충 둘러대곤 했다. 주로 닌자 임무에 필요한 도구나 수련에 도움이 될만한 책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면 사쿠모는 으레 ‘내 아들이지만, 정말 애늙은이 같다니까.’하며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카카시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다.

아버지의 빈 자리를 채워주기 시작한 사람은 미나토였다. 미나토는 선생님으로서 임무를 같이 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끔 홀로 지내는 카카시의 집에 들러 반찬 거리라든지 이런저런 생필품들을 챙겨주곤 했기 때문에, 평소 카카시가 필요로 할만한 것들을 알고 있는 편이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미나토는 그런 것들을 기억해 두었다가ㅡ 혹시 그 사이 카카시가 스스로 해결한 것들이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필요한 것인지를 확인하고는 했다. 사쿠모처럼 은근슬쩍 물어보는 때도 있었고 집청소를 해준다며 들이닥쳐서는 카카시의 살림살이를 조사해 가기도 했다.

카카시는 아버지 때도 그랬던 것처럼 미나토의 행동이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러한 배려들이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카카시에게 ‘크리스마스’라는 것 자체는 특별함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들을 꿈에 부풀게 만드는 산타라는 존재도 카카시에겐 신비감을 잃은 현실에 불과했다.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 선물…. 굳이 말하자면 그것들은 ‘기쁨’보다는 ‘귀찮음’에 가까웠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자, 이건 성탄절 기념으로 주는 거니까 챙겨가렴.」

「이게 뭐예요…?」

「뭐긴, 카드랑 양말이지!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잖냐. 카드에 받고 싶은 선물 또박또박 써서 양말에 잘 넣어 걸어두고 자야지! 안그러면 산타 할아버지가 헷갈린단다. 선물 줄 아이들이 한 두명이 아니니까! 하하하.」


덮수룩한 수염, 찬 공기에 코가 새빨게져 있던 가게의 주인 아저씨가 흥에 겨운 듯 호쾌하게 웃었다. 옆에서 여러가지 색깔로 화려하게 점멸하는 트리의 불빛을 받아 그 얼굴도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저씨의 친절함에 미안한 마음이 든 카카시는 겨우 ‘아… 저는 이런 거 필요 없는데…’ 라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넉살 좋은 아저씨는 한사코 받아가야 한다며 손수 카카시의 주머니 속에 양말과 카드를 우겨 넣었다. 양손에 잔뜩 짐을 들고 있던 카카시는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받아 들고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미나토가 떠난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이브날의 저녁이었다. 카카시는 아예 연말까지 긴 휴가를 받았었다. 아주 위급한 경우가 아닌 이상, 호출 받을 일은 없었다. 이 기간동안에는 문을 열지 않는 상점들도 많기 때문에 카카시는 미리 연휴를 나기 위한 장을 보고 돌아가는 중이었고, 마지막으로 들른 곳에서 참견쟁이 점주에게 생각지도 못한 ‘성탄절 기념품’을 받게된 것이었다. 아무리 천재니 암부니 해도 결국 사람들 눈에는 아직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릴만한 어린 아이로 보이는 걸까. 카카시는 쓰게 웃었다.

모두들 성탄절 아침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고 쏟아내고 있었다. 거리는 캐롤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넘쳐났다. 부모의 손을 잡고 해맑은 표정으로 걷는 아이들은 추위마저도 잊은 것 처럼 보였다. 땀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손을 꼭 잡은 연인들, 심지어 크리스마스 전 마지막 대목을 누리며 상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한테까지도 피곤한 기색은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축복을 받은 듯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밤이었다.

카카시는 문득 그 속에서 이제 자신은 혼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더이상 카카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서 물어봐줄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와서 선물이 없다고 아쉬워할 정도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즐겼던 적도 없었는데, 이상한 허전함이 겨울 바람처럼 마음을 파고 들었다. 카카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카카시와 관련없는 날이 되어 있었다.

카카시는 고개를 푹 숙인채 길을 걸었다.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 앞으로 하얀 눈송이가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한겨울 치고는 따뜻한 날이었지만 카카시는 평소보다 더한 추위를 느끼며 움츠러들었다. 마치 혼자서 다른 차원으로 분리된 듯 주변의 축제 분위기는 그저 현실감 없는 꿈처럼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카카시는 한숨 쉬듯 내뱉는 숨이 하얗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허망하게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며 비척비척 걸었다. 지나쳐온 크리스마스 풍경이 점점 아득해져 갔다.

썰렁하고 적막한 공기로 가라앉은 집에 돌아온 카카시는 사온 것들을 탁자위에 대충 올려놓고는 멍하니 의자에 걸터앉았다. 카카시 외에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없는 집은 마을 분위기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고요했다. 주머니에서 꺼내 놓은 양말과 카드가 왠지 처량해 보였다.


-한번쯤은 다른 아이들처럼 진심으로 말해 볼걸…그랬나….


카카시는 입가를 비틀어 자조(自嘲)했다. 왜 다들 있지도 않은 산타와 선물을 기다리며 즐거워하는지, 그 의미를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금와서 다른 사람들처럼 지내보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어 버렸는데… 우습게도, 카카시는 이제서야 받고 싶은 것이 있다고 제대로 말해보고 싶어졌다. 그게 진짜 선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카카시는 주인 잃은 물건처럼 굴러다니던 펜 하나를 기운없는 몸짓으로 집어 들었다. 단촐하게 꾸며진 카드를 펼쳐 꾸욱-하고 하나하나 선을 긋기 시작했다. 산타같은 것을 믿은 적은 없었다. 이것을 양말 속에 넣어두고 잔다고 해도 받을 수 없다는 것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제 손으로 치우고 버려야할 쓰레기가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카카시는 멈추지 않았다.

한자 한자 써 내려갈 때마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갖고 싶은게 없냐고 물어보던 다정한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마치 아직도 귓가에 속삭이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 목소리들은 너무도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어리석게도 그것을 다 잃어버린 다음에야, 이렇게 외로워진 다음에야 깨닫다니….


「우흑… 아버지…, 미나토 선생님…, 보고 싶어요… 흐흑,, 보고 싶어요….」


아무렇게나 쓰기 시작한 단어의 마지막 획 끝에서 펜이 멈추자마자 서러운 마음이 하염없이 눈물로 터져나왔다. 그들이 떠났을 때에도 이를 악물고 억눌러 참았던 울음이 생각지도 못한 이런 날에 복받쳐 오르고 있었다. 굵은 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슬픔이 카드 위에 자취를 남기며 번져갔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흐느낌만이 한동안 조용한 집안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카카시가 지냈던 십수번의 크리스마스 이브중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그 날 이후부터였다. 카카시에게 진심으로 바랐지만 아직까지 받지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긴 것은. 하지만 지금까지 실제로 받겠다고 마음 먹어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 후로 거의 10년…. 이젠 산타를 믿는 게 오히려 이상한 나이만큼 커버렸으니 평생 받을 수 있는 날은 없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서글플지는 모르지만 슬프거나 억울할 일도 아니었다.


.


한참을 옛날 생각에 잠겨있던 카카시는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훌쩍 커버렸지만 집은 그때와 많이 달라진 게 없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애처롭게 울음을 쏟아냈던 자리를 바라보니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쓸쓸한 느낌이 떠올라 쓴 미소가 흘러나온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많이 무덤덤해져 있었는데… 이렇게 새삼스러운 것은 분명, 텐조때문이다. 잊고 있었던 목소리들을,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바람을 자꾸만 꺼내보게 만드는 별난 후배.


‘뭐, 이제 그 어처구니 없는 짓도 오늘로 끝이겠지…’


카카시는 벽에 걸린 달력에서 오늘 날짜를 확인하며 생각했다. 12월 24일. 선물을 준비할 수 있는 마지막 날, 그것도 태양도 다 저물어버린 저녁이다.

ㅡ크리스마스에 받고 싶은 거 없어요?

한 때는 아버지나 미나토에게서만 들었던 질문이, 이제는 별다른 의식을 하지 않아도 텐조의 목소리로 덧씌워져 선명하게 재생돼 버린다. 사실 그 질문에 할만한 대답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텐조에겐 미안하지만, 그걸 말해 줄 수는 없었다. 텐조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그런 식으로 짐을 지우거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니까.

카카시는 자신이 대답할 때마다 시무룩해하던 텐조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다음 번에 보면 한층 더 살갑게 대해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뒤로 밀리기만 했던 독서를 할 요량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난생 처음 받고싶은 선물을 적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어린 날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커버린 카카시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카카시는 드륵- 하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히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책을 읽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희미하게 동이 터 오고 있는지 방 안에 조금씩 빛이 들고 있었다. 7시를 좀 넘어간 시간인 듯 했다. 문제의 소리는 분명 창문을 열 때 생기는 소음이었다. 이어서 곧 돌아누운 등 뒤쪽으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카카시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계속 잠들어 있는 체하며 상대를 가늠하고 있었다. 창문은 틀림없이 제대로 잠궈 놓았었다. 이런 식으로 침입하면서, 기척은 거의 완전히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실력은 아닌 듯 했다. 


‘살기(殺氣)는 전혀 없는데….’


정체모를 인기척의 동태를 살피던 카카시는 이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더이상 애써 잠들어 있는 척을 할 필요도 없어졌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아침부터 사람을 이런 식으로 긴장하게 만들다니,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줄 생각은 없는 건지… 카카시는 어제 잠깐 들었던 약간의 미안한 마음마저도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카카시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암시를 숨기지 않은 채, 태연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짜증을 가득 담아 한마디 쏘아 붙이려고 뒤를 돌아본 찰나, 황당한 광경에 순간 넋을 잃었다. 놀란 것은 카카시뿐만이 아니었는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던 문제의 주인공도 카카시가 일어나자 예상치 못했다는 듯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카카시는 잠시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식은땀만 뻘뻘 흘리며 서 있는 그 사람은 공모양의 하얀 털방울이 달린 빨간 모자를 쓰고 있었고, 턱과 코 밑에는 북실북실한 수염이 달려 있었다. 무얼 집어 넣었는지 불룩한 배와 그 위로 단단히 여며진 붉은 코트가 인상적이다. 검은 벨트와 부츠도 빼놓지 않고 착용하고 있었다. 상식과 다른 부분이라면 커다란 선물 보따리가 없다는 것 뿐.

카카시를 찾아온 것은 진짜 산타클로스였다. …일단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깊은 한숨을 뱉으면서 카카시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되찾았다. 사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서 실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황당해서 화낼 기운도 없어져 버린 카카시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어이, 텐조.”

“………”

“…뭐하고 있는 건지 물어도 될까.”


텐조는 이름을 부르자 눈에 보일만큼 움찔거리더니, 곧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엉거주춤 하던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몇 번 흠흠, 이어서 야심찬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허,허,허! 매번 지각을 하여 늦잠꾸러기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는 착한 선… 아니, 닌자로구나.”

“저, 저기… 텐…조?”

“내가 몸소 찾아온 보람이 있군. 허허허.”

“…이봐,”


어디선가 험한 꼴이라도 당해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린 걸까, 하고 카카시는 한순간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시 멍한 눈으로 이 황당한 ‘산타’를 응시하기를 수 초…. 텐조가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진심으로 하고 있구나-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딱, 정말이지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심정이 되었다. 카카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텐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오늘은 산타인 내가 특별히, 직접 소원을 듣고 이뤄주도ㄹ…ㅡ으으아앗!”

“뭐.하.는.거.냐.니.까.”


침대에 걸터앉아 텐조가 하는 양을 보고 있던 카카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텐조의 턱에 풍성하게 붙어 있는 하얀 수염을 주욱 잡아 당겼다. 얼마나 꼼꼼히 붙여놓았는지 잡아 당기는 손에 그대로 얼굴까지 딸려오면서 금세 제 목소리로 아픔을 호소하는 텐조를 보며, 카카시는 자꾸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텐조는 끊을 지점을 찾지 못하고 수습도 안돼서 자멸할게 뻔했다. 한편으론 그 모습을 지켜보고도 싶었지만, ‘한번은 구해주마.’라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라 카카시는 텐조가 아픈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아아, 선배! 아파요!”

“무단침입에 휴일날 달콤한 늦잠까지 방해해 놓고 이 정도로 넘어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래도 그렇지, 좀 모르는 척 받아주면 안되는 겁니까? 노력을 봐서라도….”

“정도껏 해야 받아주지. 이 꼴이 대체 뭐야.”


카카시의 말에 텐조는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어느새 해가 떠올라 방 안은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텐조의 복장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밝은 곳에서 보니까 텐조 자신도 새삼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는지, 슬그머니 복부에 넣어둔 이상한 솜뭉치 같은 것을 꺼내놓았다. ‘이것만이라도…’ 하는 심정인 듯 했다. 당당하게 그 상태로 찾아 온 것치고는 역시 뻔뻔함이 좀 부족하달까. 카카시는 다시 한번 휴, 하고 숨을 뱉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아무 변명이라도 해봐.”

“전 크리스마스 선물을 꼭 챙겨주고 싶었는데 어제까지도 선배가 답을 안해주셨잖아요. 제 임의대로 무언가 했다가 오히려 폐가 된다거나, 선배한텐 별로 의미없는 일이 되는 건 또 싫고… 그래서 고민 좀 했죠. 하하.”

“그 고민의 결과가 이거냐.”

“네! 어차피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거,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못받는 거잖아요? 당일이니까 아예 산타로 찾아와 물어보면 혹시 말해주실까 하고. 하핫.”


사실 텐조는 스스로라도 선물을 고를 생각으로 하루종일 고민했었다. 그러다 너무 생각이 많아지고 머리만 아파 혼란스러워 하던 중 이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텐조는 오늘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카카시가 바라는 걸 해줄 수 있을 때까지, 하루종일 카카시 곁을 따라다닐 각오까지 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선배, 오늘은 제가 뭐든 들어 드릴테니까 말만 해요! 뭐 갖고 싶은거 있어요? 아님 하고 싶은 거라도?”


정말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텐조를 보면서, 카카시는 몇년 전 쓸쓸하게 맞이했던 한 크리스마스 날의 아침을 떠올렸다. 울다 지쳐 잠들었던 기나긴 밤의 다음 날, 카카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붉은 산타양말 속- 눈물자국이 차갑게 말라버린 카드 한장뿐이었다. 결국 카카시는 그것을 차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 쓸쓸한 소원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한 채 집안의 낡은 가구 서랍속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 번도 받을 수 있을거라 기대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와서 이렇게 물어봐주는 사람이 생길줄이야. 카카시는 이상한 감정이 일었다. 그것은 마치 아주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어딘지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이었다.


“없어.”

“으- 아직도 그 소리예요? 이렇게까지 하는데 이제 아무거나 말이라도…”

“…이미 받았거든.”

“네…?”


텐조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카카시는 대답대신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기분좋게 웃어 보였다. 갈수록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는 텐조를 카카시는 여유로운 눈으로 응시했다.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곧 질문 다발을 다시 쏟아낼 것이 분명했다. 텐조의 표정이나 행동은 너무도 진지한데 거기에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수염이라든지 산타 복장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카카시는 자꾸만 실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내 쪽에서 뭔가 보답을 해야할 것 같은데. 텐조, 내가 들어줄만한 소원같은 건 없어?”

“네에-?? 선배,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같은 말 반복하는 건 안 좋아한다고 말했을텐데. 그래서 있어, 없어? 뭐ㅡ 싫음 관두고.”

“아, 아니요! 있어요! 잠깐만요, 너무 갑작스러운데…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1분.”

“윽, 너무 짧잖아요!”

“불평할 시간에 생각을 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면서도 뭐라고 대답할지 열심히 고민하기 시작하는 텐조의 모습에 카카시는 생긋 웃었다. ‘고맙다’는, 지금은 마음 속으로만 되뇌이는 이 말은 언젠가는 꼭 제대로 전해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텐조의 어깨너머 창문으로, 오랜만에 즐겁게 맞은 크리스마스의 아침 하늘이 기분좋게 시야를 가득 메웠다. 카카시는 이제 서랍 속에서 먼지만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그 카드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은 자신의 기억에서 조차 잊혀져 있던, 버려진 소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카시가 진정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은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단연코 어릴 적 자신이 써 둔 그것이었다.

당시 카카시가 그토록 서럽게 슬픔을 토해내며 울었던 것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것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존재’를 의미했다. 산타가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혹은 정체가 무엇인지, 선물로 원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ㅡ 자신을 위해 성탄절 새벽이 외롭지 않게 곁을 지켜주고, 정성을 담아 준비한 선물을 머리맡에 놓아 둘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 크리스마스가 따뜻하고 행복한 이유도 결국 그런 존재를 실감할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 날 카카시가 태어나서 가장 처음, 진심으로 원했던 크리스마스 선물도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지와 미나토가 떠남과 동시에 카카시에게서 사라져버린 존재 그 자체. 하지만 그것은 이제 더이상 얼룩진 잉크로만 머물러 있는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지금 이렇게 눈 앞에 있으니까. 카카시만을 위한, 카카시의 〈산타클로스〉는.







-fin.









 

2011. 12. 25.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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