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림 - #6.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범하게 굴러갔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아침마다 회사 정문을 들어설 때 느끼는 시원한 공기도, 사무실 특유의 긴장감도, 불규칙하게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와 팩스의 기계음, 그리고 그 사이로 섞여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도. 인생에서 손에 꼽을만큼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주변 세계는 냉정하리만치 그 모든 것을 외면했다. 마치 넌 그냥 꿈을 꾼거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텐조는 허탈감을 떨쳐내기 위해 멍해지려는 머리를 흔들었다. 꿈일리는 없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뒤엔 희미한 내용을 곱씹어 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인 그 허무한 이야기처럼, 자신이 겪었던 것을 되짚어 보는 것 말고는 해 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자꾸만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그 후로 일주일 정도는 지났을까. 카카시를 다시 마주친 일은 없었다.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는지, 아직도 힘들어 하고 있는지, 다친 손가락은 괜찮은지,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루에도 수십번씩은 그냥 찾아가서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시 마주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아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나마 할 수 있었던 한심한 일 한가지는, 아스마의 생일을 알아본 것 정도였다.

회사에서 카카시를 처음 마주쳤던 그 잠깐의 순간으로도 사고회로는 비약의 비약을 거듭했었다. 대학생일 때도 여자랑 있는 건 못봤으니까 이성애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 애인은 있을 거라는 생각, 그러니까 남자겠지, 라는 따지고 보면 일말의 근거도 없는 성급한 판단들. 그리고 그 판단에 가볍게 놀아나서 잔뜩 들떠 버리던 마음. 카카시를 집에 데려다 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얻었던 단서는 매우 적었다. 그럼에도 열병에 걸린 것처럼 생각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자신이 모르던 카카시의 세계가 눈 앞에서 한꺼풀씩 베일을 벗는 모습에 단번에 모든 것을 다 파헤치기라도 할 것처럼 열렬히 반응했다. 카카시의 집에서 나오기 전, 그 마지막 순간까지는.

거의 망상처럼 이어나가던 생각들이 막상 현실의 모습으로 그 꼬리를 보이자, 우습게도 부인하고 싶어졌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처음부터 너무 앞서 간 거라는 당연한 가능성을 이제야 제고해 보기 시작했다. 잠결에 친구 이름정도야 부를 수도 있겠지. 며칠전 사람들의 손때가 타 끝이 너덜해진 철 지난―작년 10월분의― 사보(社報)에서 아스마의 생일을 확인하면서도 텐조는 애써 그런 생각을 했었다.

카카시와 아스마의 관계, 카카시와 쿠레나이의 관계, 혹은 그 세명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카카시의 관계. 복잡한 연결 선들이 갖가지 가능성을 품은 채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붙어 있기를 수 일간. 어차피 혼자만의 생각으로 낼 수 있는 결론은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뚜렷해지는 것은 자신이 그들 중 카카시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것, 그런 일을 겪고도 마음 편히 찾아가서 안부를 물을 수도 없을 정도의 사이라는 것 뿐.

일단 부서를 옮길 때까지만이라도 머리를 비우자, 사념의 끝을 ‘잠시 보류’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은 텐조는 가벼운 한숨을 뱉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찾아온 휴게실의 자판기에서 곧 단단한 물체가 퉁,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숙여 차가운 캔의 감촉을 찾아 더듬거리는 중에 누군가가 텐조의 등 한복판을 가볍고도 경쾌하게 내리쳤다.


“여어- 텐조씨! 여기 있었네?”


바로 옆에서 말을 걸면서도 휴게실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는 호탕한 웃음소리를 낸다. 텐조는 손 끝에 닿은 캔을 얼른 낚아채고는 몸을 일으켰다. 웃음 소리만큼이나 쾌활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사람은 가이였다.


“아, 부장님.”

“오오, 자네! 카카시의 대학 후배였다며?”

“아…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긴! 카카시 녀석한테 들었지. 하하.”


또 한번 웃어제낀 가이는 텐조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 놓았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한 라이벌이었다는 말이 시작이었다. 비록 대학은 서로 다른 곳으로 갔지만, 역시 그녀석, 대학에서도 굉장했었지? 수석 졸업했으니까 말야, 졸업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스카웃 제의도 장난 아니었지. 중간중간 섞여 있는 질문도 딱히 텐조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바로 다음 문장으로 이어졌다. 무역담당 부서는 이제 곧 점점 바빠질 시기니까 텐조, 자네가 가서 열심히 해줘야 해. 카카시 그 녀석, 내버려 두면 일은 혼자 다 한다니까. 벌써부터 정신 없는 것 같더라구, 엊그제도…


“저… 부장님,”


청야(聽野)를 가득 채우는 가이의 말들 사이로, 텐조가 처음부터 알고 싶었던 것은 단 한가지였다. 카카시가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그 일이 있은 후로 가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 되니까.


“카카시 선배… 아니, 부장님은… 잘 지내요?”


뭐?, 반문하듯이 가이의 짙은 눈썹이 꺾여 올라갔다. 아, 그냥, 별일 없으신가… 해서. 텐조는 민망한 듯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가이가 지은 표정에 응했다. 가이는 이미 서로 만났던 것 아니냐는 의문을 잠시 표했지만, 곧 별일이라고 할만한 건 없다고 대답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을텐데도 없는 일거리까지 만들어서 하느라 회사에서 제일 바빠 보인다는 것 빼고는, 이란 말도 덧붙였다. 일단은 괜찮다고 봐야 하는 걸까. 다시 카카시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 속이 가득 차 버리려는 찰나 가이가 텐조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다음 주면 부서 옮겨가니까. 잠깐이지만 우리 부서 있었던 것도 인연이니 오늘 술 한잔 살까 하는데, 어때?”


텐조에게 가이의 제안은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카카시와 오랜 친구라는 사람과 그런 자리를 갖는 것은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어차피 자신이 겪고,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한마디도 털어 놓을 수 없을테니까. 어쩌다 카카시를 주제로 말하게 된다해도―사실 일을 제외하면 나눌만한 주제는 그 것밖에 없지만― 영양가 없는 수박 겉핥기식 외에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정말로, 적어도 부서를 옮겨 카카시와 일하게 되기 전까지만이라도, 카카시나 그 일에 관한 생각은 접어두고 싶었다. 안그러면 형체도 없는 정념에 흔적도 없이 먹혀버릴 것 같으니까.

정중함을 담아 적당히 거절한 텐조는 아쉬워 하는 가이를 뒤로 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그제서야 잊고 있던 차가움이 손을 통해 전해졌다. 텐조는 좀 전에 뽑아 든 이온음료 뚜껑을 잡아 당겼다. 쭉 들이키고 나면 머릿속도 좀 시원해져 있을는지. 치익- 가볍게 바람 빠지는 소리에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

그렇게 한 모금, 고개를 든 텐조 앞에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입 안에 음료가 차오르는 동안 텐조의 시야에도 반짝이는 은색과 파리한 흰색이 차올랐다. 텐조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비록 시원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텐조구나.”


먼저 말을 건넨 것은 카카시쪽이었다. 놀란 텐조는 캔을 입에서 떼어 내야 한다는 생각도 타이밍 맞게 하지 못했다. 넘쳐서 막 입가를 타고 흐르려는 액체를 느끼고 나서야 급하게 뱉어내듯 손을 떼냈다. 새하얘졌던 머리도 한박자 늦게 카카시 선배구나, 현실을 인식했다. 미처 수습되지 못한 음료가 한줄기 캔의 표면을 타고 흘러내려 텐조의 손에 닿았다. 그러나 텐조가 반사적으로 가장 먼저 시선을 보낸 곳은 제 손이 아니라 카카시의 손이었다.


“카카시 선배…. 괜찮아요?”

“아아. 덕분에.”


텐조의 눈길때문인지 카카시도 서류가 들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꽤나 지났으니까 자신이 감아준 것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밴드가 감겨 있었다.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은 가로질러 둘려 있는 밴드 때문에 조금은 둔해진 듯 보였다. 하지만 괜찮냐는 의미는, 비단 손가락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게 있잖아요. 텐조의 얼굴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득 찼다. 


“그 날…”

“그 날은, 정말 미안했어. 인사가 늦었네.”


아아, 안그래도 방금 너희 부서에 들렀을 때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네가 자리에 없어서. 같은 층도 아니라 마주칠 일도 별로 없고. 찾아 왔어야 맞지만 요즘 내가 너무 바빠서 말야. 평소답지 않게 변명 비슷한 말들을 기다랗게 늘어놓는 카카시는 시종일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카카시의 음성으로 직접 듣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휘어진 눈매의 그 옅은 미소는 온 힘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간절하게 외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더는 묻지 말아줘.


“괜찮아요.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고요.”


그런 것보다 다음 주에 저 그쪽으로 가니까 그때 봐요, 환영회 해주신다는 거 잊지 않았죠? 텐조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듯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말과 표정 어느 쪽도 진심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부서질 듯한 얼굴로 흐릿한 웃음을 짓는 카카시에게는. 그래, 나즈막히 읊조리는 카카시는 무게감 없이 바실거리는 환영처럼 어딘지 아득해 보였다.

텐조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몸을 맡겼다. 드디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 그렇게 답지않은 수다를 늘어 놓으면 정말 괜찮아 보일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 일에 대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도록 미리 말을 막아 버리기 위함이라는 것만 더욱 뚜렷하게 전해졌을 뿐이었다.

공기중에 흩어져 버릴 듯이 가물거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낱 신기루처럼 느껴질만큼 기척이 희미한 사람이었던가. 텐조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진심으로 따르고 싶어했고 존경해 왔기 때문에 그동안 느껴왔던 카카시의 존재감은 이런 게 아니었다. 높이 빛나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카카시는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어느 순간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질 것만 같다.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자신만의 카카시마저 송두리째. 그것은 단순한 실연의 의미를 넘어선 문제였다.

텐조는 작게 도리질을 하며 쥐고 있던 펜을 고쳐 잡았다. 이래서야 생각은 미뤄두기로 했던 것도 소용이 없었다. 선배를 잃는다면 모든게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겠지. 엷은 안개같은 카카시의 잔상들은 비극적인 꿈만을 보여주는 몽마처럼 텐조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


“어라? 텐조씨, 여기 있었잖아?!”


거의 때리다시피 강하게 뒤쪽 어깨를 잡는 단단한 손이 느껴진다. 오늘은 이것으로 두 번째였다. 텐조가 이 사람에게 등을 내준 것은.


“아… 가이 부장님….”


어둑한 바에 앉아 하염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텐조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몸이 기우뚱, 스툴 다리 위에 얹어 놓았던 발이 어긋나면서 거의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어어?? 놀라면서도 재빠르게 텐조의 몸을 받아낸 가이는 텐조가 중심을 잡고 다시 안정을 되찾길 기다렸다가 옆자리에 앉았다. 내가 사주겠다는 술은 거절하더니, 혼자 와서 마시고 있냐며 커다란 잔소리가 이어졌다.

확실히 상황이 우습게 되긴 했다. 가이에겐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취하는 쪽이 나을 정도로 카카시를 마주친 뒤로는 몸도 마음도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어 버렸으니까. 알콜의 힘을 빌려 생각들을 날려버리면 비록 멍청해진 뇌일지언정 의지대로 제어하는 것은 더 쉬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판단은 꽤나 잘 먹혀들고 있었다. 텐조는 이제 복잡한 생각은 커녕 시야에 느릿하게 흘러가는 장면들, 머릿속에 아릿하게 떠오르는 이름, 좋아했던 상냥하게 웃는 얼굴같은 것들을 단편적으로 인식하고 떠올리기에도 벅찬 상태였다.   

세상에, 혼자서 얼마나 마셔댄 거야? 꽤나 많이 드셨어요. 가이의 물음에 종업원이 대신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회사 근처라 그런지 자주 찾아오는 단골집인 듯 친근한 대화가 몇 번 오고 갔다. 책임지고 데려가겠다며 종업원을 안심시키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텐조는 팔을 괸 채 술잔과 이야기 하듯 눈 앞에 놓인 유리잔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투명한 액체의 표면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도 같다. 가슴이 쓰리다.


“굳이 혼자서 이렇게 마시는 걸 보니. 뭐, 실연이라도 당한거야?”


다시 텐조에게로 주의를 돌린 가이가 물었다. 개구쟁이 같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것을 보아 그냥 농담을 건넨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가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질문은 텐조를 찌르는 바늘 같았다. 신음을 토하지 않을 수 없는.


“네…, 아마도 그렇겠죠…, 하하.”

“으음?? 뭐야, 정말인거야?”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가이는 곤란해 했다. 이거, 미안한데. 멋쩍은 듯 옆머리를 긁적이면서도 금세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표정이 되었다. 이대로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자기 일처럼 들어줄 것 같은 그런 표정. 조금 거칠긴 해도 따뜻한 사람이겠지. 그래도 이런 사람이 친구로 있어서 다행이다, 카카시 선배…. 텐조는 실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다른 곳만 봐요… 저는 안 보이는지…”


텐조는 어디선가 맴돌던 말을 의미없이 중얼거렸다. 카카시 선배…, 투명한 술잔 위로 자꾸만 멀어지는 듯한 이름을 되뇌였다. 그리고 그 이름을 언제나처럼 좇았다. 놓치지 않기 위해 마지막 한줌의 의식으로도 끝까지. 선배…, 카카시 선배….

아, 자네도 짝사랑인가? 그거 힘들지. 그래도 힘 내라구. 인생사 새옹지마라잖아. 나도 오늘 자네한테 퇴짜 맞았지만 금방 다른 약속이 생겨서 이렇게 왔잖아, 하하. 아, 이건 그런 경우가 아닌가. 뭐 어쨌든…. 이봐, 듣고 있어? 이런… 뻗어 버렸네.

텐조는 이미 의식의 저편에서 울리듯이 들려오는 말소리의 의미를 알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혀 끝에선 버릴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씁쓸함이 맴돌고 있었다. 언제쯤 원하는 마음을 담아 부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단어가.






-To be continued.





 

2012. 1. 3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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