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 life - Reverse




높지도 낮지도 않은 애매한 높이의 파티션과 각종 자료들, 모니터의 시커먼 뒷면이 얼굴을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주 절묘한 위치였다. 일을 하려고 책상에 바짝 붙어앉아서 자세를 잡으면, 절대로 카카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눈치를 보며 살짝 의자를 뒤로 빼고 기지개라도 켜는 시늉과 함께 허리를 곧추세워야지만, 그때서야 일에 집중하고 있는 카카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 자리 바꾸고 싶다니깐…’


나루토는 흘끗 바로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있는 짧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았다. 자신의 직속 선배이자 사수인 텐조―가끔은 더 높은 직급인 팀장님에게 보다도 숭고하고 섬세한 대우를 해드려야 하는― 대리님이다. 수습기간 내내 이 자리에서 보아왔기에 나루토는 알 수 있었다. 텐조의 자리는 카카시가 일하는 모습을 훔쳐보기에 가장 제격인 자리였다. 자신처럼 굳이 의자를 뒤로 빼거나 스트레칭하는 척을 하지 않아도,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쳐다 볼 수 있는 명당 중에 명당이었다. 그리고 텐조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투토와 텐조의 맞은 편엔 마주보고 있는 구도로 사원이 두명 더. 카카시의 자리는 이 네명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상석에 위치했다. 그렇다. ‘팀장님’. 이것이 나루토가 불러야할 카카시의 직급이다. 위치상 자신의 옆은 텐조, 또 그 옆으로 카카시의 자리가 있어서 나루토는 카카시를 쳐다보다가 덤으로 텐조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책상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고찰이랄까. 이를테면, 텐조의 맞은 편쪽 자리도 형식상으로는 같은 거리와 구도의 위치지만 카카시 책상 위의 모니터가 그 쪽 방향으로 더 치우쳐져 있기때문에 시야각은 텐조의 자리가 훨씬 좋다는 사실따위를 분석하는 식이다.

나루토는 10분이라도 일에 집중하다보면 금세 피로가 쌓이고 좀이 쑤시고 몸은 근질근질, 엉덩이는 들썩들썩 거리는데, 이 팀장이란 사람은 정말 신기했다. 일을 못해서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는지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좀체 책상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덕분에 위에서는 더 많은 일을 맡겨대고, 그 통에 밑에 있는 사람들한테까지 일이 몰려 대리급되는 사람들은 항상 피곤에 쩔어보였다. 뭐, 텐조 대리는 눈 밑에 다크서클로 해골처럼 보일 지경임에도 언제나 팀장님, 팀장님하며 그를 거의 신처럼 모시지만. 굳이 말하면 나루토도 텐조의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똑똑하고 능력도 좋은데다가, 자꾸 그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지는 이상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깔끔하게 잘 다림질 된 흰색 와이셔츠가 어깨를 따라 만들어내는 단정한 선. 그리고 어깨 끝에서 팔로 떨어지는 시원하고 정갈한 각도는 나루토가 나도 이렇게 보이나 싶어 자꾸 제 어깨를 확인하게 될 정도였다. 물론 셔츠를 입는다고 누구나 그런 느낌을 내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 뿐이었지만. 언제나 반쯤 걷어올리고 있는 소매 끝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팔은 자연광을 받을수록 매끈해 보였다. 아마도 일할 때만 쓰는 것 같은 안경은 오똑하게 솟은 콧날 위에서 카카시의 눈을 더욱 지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웃을 때 눈이 굉장히 상냥하게 호선을 그리지 않는다면, 안경을 쓴 카카시의 이미지는 날카로운 쪽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씩 웃어버릴 때마다 평소 일할 때의 모습과는 달리 부드러운 인상이 되어서, 일거리만 줄창 받아오는 팀장이란 사실을 사람들이 곧잘 잊어버리고 마음을 사르르 녹혀 버리는 것 같았다.

태양이 늦은 오후로 기울어지면 오히려 카카시의 자리엔 햇빛이 더욱 강하게 들어 은빛의 머리칼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펼쳐 둔 자료를 보았다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눈썹이 살짝 꿈틀한다 싶으면 잽싸게 펜을 집어들고 뚜껑을 이로 물고는 가볍게 당겨 연다. 그리고는 사각사각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여전히 물려 있는 뚜껑에 그대로 펜을 다시 넣고는 엄지 손가락으로 뚜껑 끝을 꾸욱, 마무리는 숨 돌리 듯 가볍게 나오는 한숨. 카카시의 이런 작은 동작들마다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한올 한올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시간쯤엔 블라인드를 내려 놓아도 꼭 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카카시의 업무를 방해한다. 모니터의 반사 빛이 시야를 흐리는지, 카카시는 미간을 좁히고는 모니터 각도를 이리저리 조절하고는 했다. 그리고 살짝 더워지는 공기를 느끼면 넥타이를 당겨 헐겁게 만들었다. 좌우로 슬슬 움직이는 그 손짓 위로 하얀 목이―목에서 쇄골까지 이어지는 선이― 조금 더 드러나는 순간을, 나루토는 언제부터인가 매일같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획 1팀장 카카시입니다.”


책상 한쪽에 놓인 전화에서 벨이 울리고, 카카시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기울여 어깨 사이로 수화기를 고정시키자, 반대편으로 길게 도드라진 목선에 햇빛이 떨어졌다.

아, 그 자료요. 네. 기획서에 첨부해서 가져 가겠습니다. 차분한 저음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왜 사무실 공기는 텁텁하고 건조하다는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것일까? 나루토는 공기마저도 상쾌하고 청량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아마 신화 속에나 나오는 그리스 신전 같은 곳의 공기가 이렇지 않을까? 저런 단아한 여신도 있고…


‘아, 가만. 그냥 신도 아니고 여신?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니깐.’


나루토는 혼자서 고개를 흔들고는 손바닥으로 양 뺨을 가볍게 탁탁 쳤다. 자기도 모르게 또 한참을 넋 놓고 있었다. 나루토는 괜스레 무안한 기분이 들어 누가 본 것은 아닌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자신만 빼고는 다들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혼자서만 일은 안하고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게 다행이라기엔 어폐가 있지만.

나루토는 남은 업무에 다시 집중하기 위해 의자를 당겨 앉고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잡무가 거의 대부분이었으나 인턴 기간이 끝난 이후로는 일을 조금씩 할당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확실히 인턴때보다는 의욕이 생기는 편이었다. 좋아, 다시 시작해 보자니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던 나루토에게 화면 한구석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오후 4시, 그리고 이제 막 9분에서 10분으로 숫자가 바뀌고 있었다. 아, 조금 있으면 퇴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섬광처럼 스쳐가는 생각 때문에 나루토는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조용하게 생활 소음정도만 나던 사무실을 몰상식한 괴성이 가르고 지나가자, 다른 팀 사람들까지 눈살을 찌푸리며 소음의 근원지로 시선을 모았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텐조가 불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무슨 일을 치는 건지 걱정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뭐 문제 있어?”

“아, 아니, 그, 그, 그게요!”

“그게 뭔데.”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나루토와는 달리 텐조는 차분하고 다소 차갑기까지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그 때문에 나루토는 더욱 간이 콩알만해지고 주눅이 들었다. 아 정말, 이걸 어떡하냐니깐!


“그, 거래처에서 오늘 시안을 가져다 달라고 했는데요…”

“그런데?”

“그게 4시 반까지라니깐요!”


나루토는 마지막엔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지금 팩스 보내면 되잖아-. 시간을 확인한 텐조는 그게 무슨 심각한 일이냐는 듯이 타박조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나루토가 이렇게 하얗게 질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나루토는 절박한 심정으로 울먹였다.


“그게요― 이번엔 출력물을 직접 보고 결정하시겠다면서 가져오라고 했다니깐요! 중요하고 급한 일이니까 시간 꼭 지켜달라고 했는데… 늦으면 이번 건은 거래 안한다고… 어떡하냐니깐요, 어흑, 점심때 시안을 받아놓긴 했는데 지금까지 까먹고 있었…, 아 거기 과장님 안그래도 무서운데… 흐어으엉…”


거래처까지 가야 하는데 이미 시간은 20분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하철이나 버스로 두 세정거장일 뿐이라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걸어가기엔 멀고, 대중교통도 정류장까지 가서 타고 내리는 부가적인 시간들까지 더하면 이미 늦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루토는 울상인 얼굴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다리를 떨며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나루토의 말을 듣고나자 이번엔 텐조까지 덩달아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바보야, 지금 그 말할 시간에 얼른 가! 가는 길에 좀 늦는다고 전화하고! 아니 됐어, 전화는 내가 할테니까…”


그때였다. 탕-! 하고 울리는 굉음이 또 한번 사무실을 뒤흔들었다. 모두들 이번엔 그 굉음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나루토는 텐조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텐조는 정 반대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서랍을 열었다 닫으면서 나는 소리였는지, 카카시의 오른 손엔 차 열쇠가 들려 있었다. 카카시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두었던 수트 재킷을 집어들었다. 사람들은 정적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때마침 전화벨이 울리고, 텐조가 재빨리 받았다. 하지만 카카시는 전화같은 것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텐조의 자리를 지나쳐 출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재킷은 목깃쪽에 손가락 몇 개만 걸어 어깨 뒤로 걸친 채였다. 나루토는 카카시가 자신의 옆을 지나쳐 가는 동안에도 카카시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만 돌릴뿐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있었다. 책상 쪽에서 벗어나 두어걸음 더 옮긴 카카시가 이윽고 잠시 멈춰서 고개를 돌렸다. 나루토를 내려다 보는 눈은 감정이 없었다. 다만 안경 알에 빛이 반사되어 좀 더 날카로워 보였다. 그래서인지 나루토는 언뜻 카카시의 표정이 화가 난 것 같다고 느꼈다.


“안 따라오고 뭐 해.”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도 역시나 별다른 감정은 읽기 힘들었다. 카카시는 네, 넷! 하고 허둥지둥 일어나는 나루토 뒤쪽의 텐조에게 시선을 옮겼다. 방금 울린 전화가 마침 그 거래처에서 언제 오는 거냐고 독촉하는 것이었는지, 텐조는 곤란하단 표정으로 나루토와 수화기를 번갈아 손가락질 하며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카카시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서 텐조에게 말했다.


“내 이름 대고 늦을 일 없을 거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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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토가 카카시를 뒤쫓아 도착한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당황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카카시를 정신없이 따라 오기만 한 나루토는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고 나서야 겨우 상황파악이 되었다. 확실히 차가 있으면 어찌어찌 시간내에 갈 수도 있다. 나루토 자신은 차가 없기 때문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편이었다.


‘팀장님이 직접 데려다 주는 거냐니깐!’


나루토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일단 카카시가 화가 나 있는 것 같기 때문에 단 둘이서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더욱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차를 찾아 빠른 걸음을 옮기는 카카시의 단호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는 길에 엄청나게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리고 두근거리는 마음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로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설렘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까진 출퇴근 길에 마주친 적이 없어서 카카시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개의 주차 구역을 지나자 카카시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다시 꺼냈고, 곧 한쪽에서 삐릭- 하는 전자음이 났다. 나루토는 소리가 난 챠량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비스듬하게 줄지어 세워져 있는 차들 중 카카시보다 두 세대 앞쪽에 있던 차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지하의 어둑한 밝기에도 옅게 빛나는 은색의 중형차였다. 팀장님 머리색 같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헤- 입을 벌리고 있는 나루토를 향해 카카시는 얼른 타라는 시선을 보냈다. 나루토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보조석으로 향하자 카카시도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보조석에 재킷을 두려던 카카시는 나루토가 차 안에 발을 들이자 잠시 멈칫하더니 뒷 좌석에 옷을 옮겨 놓았다. 목에 걸려 셔츠 앞주머니에 넣어져 있던 사원증을 한 손으로 빼 드는 동작은 이미 수백, 수천번은 해 본 듯이 자연스러웠다. 카카시가 안전벨트를 찾아 매는 것을 보고 나루토도 왼쪽 어깨 뒤에서 벨트를 잡아당겨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휴우. 답지않게 살짝 한숨을 내쉰 나루토는 눈치를 보며 카카시를 힐끗거렸다. 시종일관 긴장된 분위기에 뻣뻣하게 온몸이 굳는다.

나루토는 성격상 이런 분위기를 잘 견디는 편이 아니었다. 평소같으면 농담을 걸어보고도 남을 상황.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말을 해볼까 하다가도, 카카시가 불쾌해 하거나 지청구를 들을까 겁이나서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하던 일도 멈추고 예정에 없던 발걸음을 하는 것이니, 일단 너무 죄송스럽고 민망해서 고맙다는 말조차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루토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카시는 막힘없이 시동을 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기어를 P에서 R로 바꾸어 넣고 있었다. 시동이 걸림과 동시에 불이 들어온 차안에서 15분이 넘어가고 있는 시계를 확인하자, 나루토는 그제서야 한번 더 자신의 현실을 깨달았다.


‘아, 이렇게까지 가는데 늦으면 끝장이라니깐!’


나루토는 거래처 생각에 다시금 칼이 바로 목 밑으로 들어온 듯 바짝 긴장했다. 카카시가 그런 나루토 쪽으로 왼팔을 뻗어 왔다. 나루토는 자신을 향한 움직임인 줄 알고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카카시는 나루토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표정으로 차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원증이 여전히 들려있는 왼손이 보조석 의자의 어깨부분에 닿는 것을 본 나루토는 그제서야 움츠렸던 몸을 조금 편안히 했다. 사원증에 달린 줄이 나루토의 팔 옆에서 달랑거렸다.

나루토는 자신이 앉은 의자에 얹힌 카카시의 손을 바라보았다. 길고 살이 없는 손가락은 마디뼈가 적당히 굴곡을 만들고 있었다. 여자손 같지 않으면서 투박하지도 않은 단정한 모습이었다. 아래쪽 손목에 도드라진 힘줄이 위로 따라 올라갈수록 자취를 감추고, 팔에 군데군데 푸릇하게 이어진 핏줄이 하얀 피부색 때문에 더욱 눈에 띄었다. 뒤로 한껏 고개를 돌린 목선에는 턱이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시선은 여전히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화나신 것 같아.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카카시는 사원증의 끝을 입으로 물더니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근무 할 때만 쓰는 안경이라 먼 곳을 볼때는 오히려 안 맞는 듯 했다.

카카시는 평소에 안경을 쓰지 않고 생활하는 것 같지만 나루토 입장에서는 안경을 벗은 모습을 더 보기가 힘들었다. 안경을 벗으면 이런 느낌이 되는구나. 더 부드러워 보여-란 생각이 듦과 동시에, 차는 브레이크의 압력에서 벗어나 뒤로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경을 쥔 왼 손이 다시 보조석의 등받이 위에 놓였다.

관성의 영향이 사라지고 제 속도를 찾은 차가 막힘없이 미끄러졌다. 어느정도 차가 빠져나가자 카카시는 핸들을 왼쪽으로 돌렸다. 차체가 왼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계속해서 후진했고, 나루토는 앞쪽과 뒤쪽을 번갈아 보는 카카시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카카시를 따라서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어, 부딪…힉!”


아슬아슬하게 차 끝이 뒷차에 부딪힐 것 같아 소리치던 나루토는 갑자기 멈춘 차 때문에 몸이 출렁임과 동시에 혀를 깨물었다. 다소 거칠다 싶게 브레이크를 밟은 카카시는 곧바로 기어를 주행상태로 바꾸며 한 손으로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크게 꺾었다. 브레이크를 놓자 이번엔 차가 우측으로 꺾여 앞으로 나갔다. 주차 구역들 사이로 난 길에 완전하게 접어들었을 때 차는 온전히 제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카카시는 기어 레버 옆에 있는 수납공간에 안경을 집어 넣고는 사원증을 다시 손에 쥐었다. 주차장 내 치고는 조금 빠르게 달리던 차가 주차장 입구에 도착하자, 한번 더 멈추었다. 어차피 얼굴은 눈으로 보면 알고, 직함이 이름처럼 쓰이는 회사인데 굳이 사진과 이름이 박혀있는 사원증을 꼬박꼬박 달고 다녀야 하는지 나루토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그 진정한 쓰임새를 알게 될 줄이야. 카카시가 기계에 사원증을 갖다대자, 띠릭- 하는 전자음과 함께 주차사항이 체크가 되었다.


“아… 그게 주차증으로도 쓰이는구나. 여태 몰랐다니깐요.”


나루토는 얼이 빠져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다가, 깨문 혀가 얼얼해서 입안으로 계속 이리저리 상처를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살짝 느껴지는 혈향에 절로 윽, 하며 인상을 쓰게 되었다. 순간 카카시의 입꼬리가 피식, 하고 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다시 보니 카카시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잘못 본 건가? 싶으면서 나루토는 다시 한번 긴장감에 휩싸였다. 이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죽었다 생각하고 잘못을 비는 수밖엔 없었다.  

무언가 꾸지람을 듣게 될 거라며 굳어있는 나루토의 생각과는 달리, 카카시는 말없이 다시 한번 왼팔을 뻗었다. 아까처럼 그런 것이겠거니, 하며 무방비한 상태로 있던 나루토는 이번엔 정말 제 어깨를 잡아 누르는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팀장님…?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는 순간, 또 한번 차가 덜컹. 카카시가 어깨를 누르고 있어 나루토는 크게 요동치지 않을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나온 뒤로 건물 사이 골목길로 들어선 차는 그렇게 몇 번씩 과속방지턱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과속방지를 위한 요철인데 카카시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리고 있었다. 이런 골목길에선 확실히 빠른 속도로. 회사 건물들만 줄지어 있는 곳이라 이 시간엔 도보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핸들을 꺾고 다시 엑셀을 밟아 속도를 내는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시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달리면서도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주는 카카시의 배려에 나루토는 긴장감이 사그라들고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잠시 후에 이젠 남은 것이 없는지 카카시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생각보다 따뜻했던 온도. 나루토는 왠지 모를 아쉬움마저 느껴졌다. 큰 길로 들어서고 나서 나루토는 제가 운전을 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20분도 되지 않았고 차로는 빠르면 5분만에 주파가 가능하니 가능성이 있었다. 희망이 생긴데다 카카시의 상냥한 행동에 용기가 생긴 나루토는 특유의 표정으로 밝게 웃었다.


“팀장님 운전 진짜 잘하시네요! 헤헤…”


갑자기 올라간 나루토의 목소리에 카카시는 힐끗 곁눈질을 하고는 다시 앞을 주시했다. 얼굴은 여전히 기분을 알기 힘들 정도로 무표정했다.


“글쎄, 난 원래 안전운전을 선호하는데 말이지.”


화로 격앙되어 있거나 원망하는 투로 한 말이 아닌, 낮고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평이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나루토는 말 속에 뼈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순식간에 다시 침울해졌다. 역시 화나신 거라니깐. 더 이상 쓸데없이 말을 걸었다간 되려 혼나기만 하겠다는 생각에 나루토는 고개를 숙였다. 그저 늦지만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나루토의 답답한 상황과는 달리, 다행히도 차는 막힘 없이 달려 나갔고 신호가 바뀌는 타이밍도 두 사람을 돕고 있었다.

거래처에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시간이 말도 안되게 빨리 흐르는 것 같은데, 카카시와 둘이서 차 안에 있는 것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라 1분이 천년처럼 느껴진다. 나루토는 이 모순되는 시간의 속도감에 정신이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차라리 이대로 말없이 잘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나루토의 바람과는 다르게 결국 카카시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거기 과장님이 이런 식으로 엄포를 놓는 분은 아닌데…”

“네, 넷?”

“시안도 보통은 내가 가져가면 되거든. 실제로 다음주 미팅 때 가져가기로 했고.”

“그게 무슨 소리냐니깐요?!”

“그러니까 결론은… 뭔가 엄청나게 밉보인 게 있다는 거겠지.”


카카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생긋 웃었다. 분명 좋은 말이 아닌데도―그것도 상사한테 듣기에는― 그 웃음 때문에 나루토는 칭찬이라도 들은 듯한 착각을 아주 잠깐동안 했다. 하지만 금세 상황파악이 되면서 자괴감마저 몰려왔다. 인턴을 마치고 나서 처음 정식으로 맡게 된 거래처였다. 오랫동안 연을 맺은 곳이라 손발도 잘 맞고, 까다롭게 굴지도 않고, 실수를 하더라도 리스크가 적어서 신입에게 적당하다며 맡겨진 일이었던 것이다. 나루토가 그 쪽에 첫인상을 좋게 심어주는 데에 실패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장이란 사람은 나루토에게 너무 딱딱하고 무섭고 어렵기만 했다. 실은 나루토는 지금 거래처로 갈 때마다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두려움에 떠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처음 맡은 일을 이따위로 하고 있으니,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루토는 다시 울상이 되었다.


“혹시 지각한 적 있었어?”

“그게… 첫날에요, 처음 가는 거라 길을 헤맸다니깐요!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찾긴 했어요. 사무실로 막 뛰어가다가 어떤 사람한테 부딪혀서 커피를 엎었는데, 너무 급한 나머지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갔거든요.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까…”


카카시가 뒤는 안들어도 알겠다는 듯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부딪힌 분이 과장님이었다니깐요…”


나루토는 말을 하면서 점점 고개를 땅에 박을 듯이 떨어뜨렸다. 아, 이런 말 밖에 할 말이 없다니. 이제는 정말 짤리는 일만 남은 걸까. 이제 팀장님하고 볼 일도 없어지는 걸까.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까지 머릿속에 몰려들었다. 결국 이유없이 불려다니면서 길들임을 당하고 있는 꼴이었지만, 그것도 다 처음에 자신이 실수해서 그런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불호령부터 떨어질 것이고, 일을 마치고 나면 또 깨질 것이고. 이렇게 가는데 결국 늦기라도 한다면 카카시 얼굴을 볼 면목조차 없어질 것이었다.


“뭐, 처음엔 다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지.”


카카시가 다시 한번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이번엔 하는 말도 실수투성이인 나루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다독임이다. 나루토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카카시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핸들을 조정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조언의 말도 해주기 시작했다. 카카시 자신이 해도 되는 일을 굳이 따로 맡긴 것에 대해서는 ―혹 따질 땐 따지더라도― 일단 제대로 해주는 게 우선이라는 것. 또 그 사람은 시간 약속 어기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첫만남부터 지각을 한 나루토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 하지만 원래는 그렇게 무섭거나 융통성 없이 까탈스러운 사람이 아니니, 앞으로 성실한 인상을 심어주고 맡기는 일을 제대로 해내면 금세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나루토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여전히 시선은 앞을 향한 채, 자신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 버릴 수도 있었는데, 카카시의 말 몇마디에 나루토는 마음을 다잡았다. 영락없이 깨질줄로만 알았건만 오히려 감싸주기도 하고, 필요한 말도 해주니 앞으로는 정말 실수 없이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또 자신의 팀장이 카카시라는 사실이 새삼 든든하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어느새 나루토의 눈에 낯익은 거리가 나타났다. 카카시는 말을 멈추고 차선을 바꿔 차를 보도가 있는 쪽으로 붙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건물 앞에 다다르자, 차가 완전히 멈추어 섰다. 나루토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팀장님? 여긴 뭔가 아닌거 같다니깐요.”

“하아… 역시 모르는구나. 건물 뒤편이야. 저기 편의점 옆에 작은 출입구 보이지?”

“네.”

“거기로 들어가면 직행 엘리베이터가 있어.”

“아! 몰랐다니깐요! 고마워요! 금방 갔다 올게요!”


시간은 25분. 뭐 그럭저럭 세이프한 셈이었다. 나루토는 카카시가 인사 대신으로 보인 미소를 뒤로 하고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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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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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좋지는 않은, 하지만 지금까지에 비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을 거래처 과장에게서 얻어내고 나온 나루토는 카카시가 아까 주차했던 곳에 다시 도착했다. 몸 속에 딱딱하게 얹혀있던 무언가가 시원하게 내려간 느낌이었다. 나루토는 돌아갈 땐 카카시와 좀 더 여유있게 이야기도 하고 친해질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리고.


“엥―? 어디 가신거냐니깐!”


카카시의 은색빛 차가 서있던 곳은 휑하게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은색은커녕 그 비슷한 색깔의 차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주차하는 공간이 아니라서 다른 곳으로 옮겼나 싶기도 했지만, 주변 지리를 잘 아는 것은 아니라 무작정 찾아 나서기에도 애매했다. 나루토는 고민하다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언젠가 저장해 두었던 카카시의 번호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전화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네, 하타케 카카시입니다.]

“팀장님, 저 나루토예요. 어디 계세요? 저 이제 다 마치고 나왔다니깐요!”

[아아 그래, 잘 전해 드렸어?]

“네. 마음에 들어 하셨다니깐요.”

[잘 됐구나.]

“네. 그런데 팀장님 어디 계신거예요? 제가 그쪽으로…”

[저기, 나루토군?]

“네, 팀장님!”

[그래, 난 팀장이지. 나루토군의 운전기사가 아니잖아?]

“아…………”

[얼른 와서 퇴근 시간에 정식으로 퇴근해. 아, 텐조가 맡긴 보고서는 오늘 내로 끝내고.]

“네………”

[그럼.] 


통화가 끊긴 신호음이 냉정하게 나루토의 귓가를 울렸다. 나루토는 한동안 멍하게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지갑도 재킷에 넣어둔 채 두고 나왔다. 걸어서 가려면 적어도 30분은 꼬박 걸리는 거리였고, 텐조가 맡긴 보고서라는 건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야근 확정이었다.

화가 났나 싶어 시종일관 긴장해 있었는데, 그렇게 웃으면서 다정하게 이야기 해주더니. 이번엔 이런 식으로 배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을 하다니.


“으으! 역시 화 났었던 거라니깐!”


정말 예측도 힘들고 속을 읽기 어려운 사람이다. 통화가 끊기기 전에 차가 잠기는 전자음 같은 것이 들린 것으로 보아, 카카시는 정말로 먼저 가서 이미 도착한 것 같았다.

나루토는 할 수 없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혀 한쪽에 난 상처의 통증이 쌉싸름하게 입안에서 퍼져 나갔다. 이리저리 혀를 굴려보며 그 차안의 분위기와 감촉, 카카시만의 공간에서 느껴지던 내음, 자신에게 와 닿던 체온, 익숙한 자리에서 익숙하게 움직이던 작은 동작들을 떠올렸다. 먼 거리를 걸어가고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어쩐지 미소가 흘렀다. 나루토는 묘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도착하면 다녀왔다니깐요ㅡ! 라고 큰소리로 인사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Fin.








 

2012. 5. 1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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