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인적이 드문 골목길. 내 얼굴은 복면과 서클렛에 가려져 눈 앞의 녀석에게 제대로 드러나진 않겠지만, 나는 분명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이런 실랑이는 소모감만을 낳았다. 적어도 내겐 고문과도 같다. 이 녀석은 언제쯤이면 깨달을 건지. 확실한 것은, 먼저 지치는 건 내쪽이란 것이다. 실망한 듯 잔뜩 찌푸린 녀석의 눈매에 가슴 깊은 곳에서 솟는 한숨을 감추지 않았다.


“선생님, 좋아한다니깐.”

“나는 너 관심없다고 몇 번을 말해.”

“선생님!”


나루토는 무턱대고 양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부딪쳐 오는 힘에 한발짝 물러서자 담벼락의 차갑고 거친 기운이 등에 와 닿는다. 턱 밑을 간질이는 금색의 머리카락. 어깨를 밀어내도 더욱 엉겨붙기만 하는 몸. 별 말을 않자, 조르듯이 더욱 품에 파고들며 뺨을 가슴에 부빈다.


“나는 정말 진심이라고요.”

“글쎄, 그 진심이라는 게 문제라고.”  


아이처럼 떼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적어도 드러난 한쪽 눈은 곤란함보다는 차가움을 담고 있다. 그리고 넌 이 눈을 믿겠지. 그렇게 보란 듯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나루토의 어깨를 잡은 손에 차크라를 모았다. 거의 내칠 기세로 힘을 주며 밀어내려 하자,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나루토는 금세 떨어져 나갔다. 독기마저 오르기 시작한 눈빛을 외면하며 녀석을 지나쳐 골목길을 빠져 나온다. 뒤에서 ‘선생님!’ 하고 외치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확실히 깡그리 무시해 버리기에는 조금 버거운 것이다. 몇 번이고 진심이 묵살되는 비참함,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는 원망과 억울함. 하지만 나루토가 내뿜는 감정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숨막히는 기시감. 답답함에 깊게 심호흡을 한다.

넓은 길가로 나오자 시원하게 트인 시야에 양각으로 새겨진 커다란 얼굴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내게 어리광을 부려서는 안되는 거였다.
나는 그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진심이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



카카시가 창가에 누군가 나타났다고 깨닫자마자 그 인영은 거리낌 없이 침대로 뛰어들었다. 침대가 출렁이는 충격에 카카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기대어 앉아 읽고 있던 책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四代目火影라고 쓰여진 등을 뻔뻔하게 드러내고 침대를 가로질러 엎어져 있던 금발의 남자는 곧 몸을 뒤집어 천장을 보고 드러누웠다. 카카시는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동시에 남자가 낸 더 큰 한숨에 소리가 묻혀 버렸다.


「…오늘은 또 왜 싸우셨어요, 호카게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책에 몰두하는 카카시. 어차피 언제나와 같은 류의 이야기일테니까, 그런 것쯤 건성으로 들어도 된다는 아이답지 않은 건방진 태도였다. 그러나 카카시는 곧 제 스승에게로 다시 눈길을 돌려야 했다. 평소와 같은 ‘쿠시나가…’로 시작하는 푸념이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평소보다 기운없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천장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고, 장난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표정은 진지하게 굳어 있었다. 카카시는 평소의 짓궂고 뻔뻔한 미나토도 버거웠지만, 이런 미나토는 더더욱 힘겨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호카게님.」

「여자라는 건 가끔 너무 복잡해, 카카시.」


미나토는 천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푸른 눈동자는 묘하게 슬픈 빛을 띠었다. 이 표정만큼은 카카시도 알고 있었다. 미나토는 언제고 이런식으로 불쑥 카카시를 찾아와서, 지금처럼 외롭고 허전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했다. 그것은 단순히 쿠시나와 싸우고 나서 느끼는 허탈감 같은 것일 때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가끔은 딱히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호카게라는 지위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카카시는 그렇게 이해했다. 그래서 미나토의 예고없는 방문을 그럭저럭 받아주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힘들어. 카카시는 생각했다. 이제는 끊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호카게님,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이제 곧 결혼도 하실 거잖아요. 여긴 그만 오셔야죠.」

「결혼 안 해.」

「………네?」

「헤어졌어, 쿠시나랑.」

「………」


어느새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 벽안에 카카시는 흠칫 놀랐다. 허둥지둥 시선을 책 속으로 돌리며 짐짓 무표정한 눈매를 가장했다. 부디 한순간이라도 눈동자에 비치지 않았기를. 헤어졌다는 말에 잠시나마 들었던 기쁜 마음이.


「농담하지 마세요.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카카시는 책을 보며 무관심한 체 했지만, 어렵게 꺼낸 말조차 제대로 이어내지 못했다. 어느새 이불을 거의 걷어낸 미나토의 손이 더듬더듬 카카시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카시는 미나토가 눈치채지 못하게 복면 아래로 입술을 짓씹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찾아올 때마다 미나토는 곧잘 카카시의 몸을 이곳저곳 만지고는 했다. 굉장히 자연스럽거나 얼떨결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가령 함께 차를 마시다가 문득 팔을 뻗어 말랑한 귓불을 문지른다거나, 책을 같이 보자며 뒤에서 안아오는 팔이 상의 안으로 들어온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딱히 화를 내거나 철저하게 거부하기에도 애매해서 카카시는 대부분 미나토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었다. 훈련이나 임무에서 좋은 성과를 낼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주던 버릇처럼 별 의미없는 손길이라고, 카카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공연히 두근거리지 않도록 애써 자신의 마음을 눌러야 했다. 

하지만 요즘들어 카카시는 미나토를 제지해야 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닿는 곳마다 달아오르는 열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더욱이 미나토의 손길도 점점 대담해져 가고 있었다. 벌써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만두라고 이야기 했었다. 다행히도 그때마다 미나토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손쉽게 물러나 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웃음이었다.


「농담 아니야. 말도 없이 짐 싸들고 자기 마을로 아예 가버렸는 걸. 아무리 싸워도 이런 적은 없었어.」


여전히 드러누운 채로 카카시를 바라보는 파란 눈은 어딘지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표정보다도 공허했다. 정말이구나…. 미나토를 보며 잠시 애틋한 마음이 들었던 카카시는 사타구니까지 침범하는 감촉에 몸을 움칫 떨었다. 미나토의 손은 얼굴표정과는 전혀 따로 놀고 있었다.


「…그만해요, 선생님.」


미나토는 작게 웃었다. 예의 그 천진한 웃음이었다. 미나토는 그렇게 지금까지처럼 별 말없이 손을 거두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카카시의 얼굴 바로 앞으로 시선을 붙여왔다. 카카시가 들고 있던 책은 어느새 빼앗겨 협탁 위로 던져졌다. 떨어진 줄 알았던 손은 오히려 카카시의 허벅지를 더욱 꽈악 잡고 있었다. 카카시는 잡힌 곳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지만 가까이서 자신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미나토의 눈빛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선생…님?」

「조금 더….

조금 더 감정을 잘 숨길 수 있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훌륭한 닌자가 될 거야, 카카시.」


카카시는 얼굴에 확 열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은밀한 곳을 적나라하게 내보인 것 같은 수치감마저 들었다. 평정심을 찾기 위해 시선을 옮겨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푸른 눈이 느껴져 마른 침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네 오른쪽 눈, 너무 솔직해.」

「………」

「네 몸도. 음― 몸은 고치기 힘들겠지만.」


카카시는 미나토 손에 잡혀있는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다 보았다. 비록 옷 위로 감지되는 느낌이었지만 임무중 극도로 흥분해 있을 때보다도 더 감각이 예리해진 기분이었다. 귓가에 자신의 심장소리가 둥둥 울려댔다. 이래서였다. 더 이상 미나토를 이런 식으로 들여서는 안되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 숨기는 것도 견디는 것도 힘들면서― 쿠시나와 싸울 때마다 미나토가 찾아오는 것이 내심 반가웠던, 그럼에도 위로를 해주는 의젓한 제자 행세를 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모습이 참을 수 없어서였다. 어차피 품어서는 안될 감정을 품은 것은 자신이었다. 끊어내고 진짜 제자로, 호카게 직속 암부로 돌아가면 되는 일.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못을 박아둘 생각이었는데, 왜 하필 그 순간에 미나토는 이렇게 나오는 것인지. 그것도 이제와서. 카카시는 야속하고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어차피 알고 있었던 거라면, 끝까지 모른척 해주면 좋을텐데.


「이거 놔요, 선생님.」


카카시는 직접 미나토의 손을 잡아 떼어내려 했다. 그리고 미나토의 눈길은 여전히 피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호카게님도 표정에 다 드러납니다. 여기 올 때마다.」

「하하.」


예상치 못한 웃음소리에 카카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눈으로 시선이 다시 마주치자 미나토는 한층 더 다가왔다. 이미 기대어 있던 카카시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데 상체를 더욱 벽에 붙여야 했다. 미나토가 내뱉는 숨결이 콧잔등에 규칙적으로 닿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차마 미나토의 눈빛을 외면하지도 못한 채, 애꿎은 손에만 더 힘을 주며 미나토의 손을 떼어내려 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 힘으론 안돼, 카카시. 그리고 그거 알아?

너, 이런 걸 그만 두라고 할 때에만 날 선생님이라 불러.」

「그럼…. …놔 주세요, 호카게님.」

「하, 이럴 땐 정말 하나도 안 귀엽다니까.」


기껏 뱉은 말이 고작 조소로 밖에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심이었는지 카카시는 어느새 꽤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하지만 미나토의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아플 정도로 더 조여오기만 할 뿐이었다. 희미하게 웃음기가 도는 미나토의 표정은 굳이 선생님 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카카시는 힘으로 저항하는 것은 포기했다. 이제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고 알아서 떠나주기를 기다리겠다 마음 먹었다. 처음부터 떠보려고 장난친 것 뿐이었을 말에 동요한 것이 바보같았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카카시는 최대한 평소의 무심한 눈으로 미나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 보았다. 그런 카카시의 의지가 전해졌는지 미나토도 사뭇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하늘처럼 파란 눈이 유난히 빛났다.


「한가지 더.」


미나토의 목소리는 조금 낮게 깔려 있었다.


「난 감정을 숨기지 않는 거야, 카카시. 너에게 일부러 드러내는 거지.」


자신의 말을 확인시켜 주듯이 미나토의 손에 지그시 힘이 실렸다. 어느새 좀 더 골반 가까이 올라와 있는 감촉에 카카시는 작게 떨었다. 그와 동시에 미나토는 희미하게 웃으며 카카시의 귓가에 속삭였다.


「카카시, 널 안고 싶어―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거야.」


카카시는 순간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숨을 쏟아낼 뻔 했다. 왼쪽 눈을 감고 있는 것마저 잊은 채로 시야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자신의 얼굴을 어느새 미나토가 다시 마주하고 있었지만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귓가에서 미나토의 입술이 달싹이는 듯 했다. 어떤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마음따위는 너무도 무력한 것이었다.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리고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단순히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어서 나오는 반응이 아니었다. 미나토에게 잡혀 있는 다리에서부터 시작된 열이 전신에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나토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넌 어때, 카카시.」


이번엔 콧등에 떨어지는 입김. 카카시는 어떤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미나토도 딱히 카카시의 대답을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드디어 허벅지에서 떨어진 손은 카카시의 얼굴에서 복면을 벗겨냈다. 이성적인 사고능력은 멈춰 버렸음에도 여전히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침투했다.



.



며칠간은 매일 밤 같은 꿈에 시달렸다. 엉덩이에 부딪혀 오는 맨살의 느낌과 이물감이 쉴 새 없이 들락거리는 감각. 허공에서 흔들리던 다리가 달뜬 기분에 남의 것처럼 보이던 현상. 치부를 그림자 하나 없이 내보이는 치욕감은 그래도 차라리 괜찮았다.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몸만큼이나 벌거벗겨진 마음, 거기서 오는 수치심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덮어 씌우던 거부할 수 없는 쾌락. 그 와중에도 미나토를 느끼면서 조이고 신음하던 자신….

태어나서 닌자로 살면서 그 어떤 순간도 이보다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가족이나 동료를 잃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실감이었다. 죄의식이나 배덕감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한번 열린 몸은 한동안은 몇 번이고 같은 것을 받아내야 했다. 카카시가 쿠시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카카시도 알고 있었다. 그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시간일 뿐이라는 것을. 

카카시에겐 반복해서 스스로 상처만 내는 꼴이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카카시의 경우 심리적으로 완전히 패배했다. 차라리 몸에 멍이 들도록 때리고 눌러 잡아 신체를 구속했다면 뒷 일이야 어떻게 되든 싸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다 죽거나, 호카게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명목으로 쫓겨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나토는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카카시의 약점이란 것은 사실 허무할 정도로 시시했다. 미나토의 개구진 웃음, 그 사이로 숨기지 않는 공허하고 갈증하는 표정, 속삭이는 목소리, 자연스레 닿는 손길, 추억할 수 있는 모든 기억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처럼, 미나토는 카카시를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언제쯤 이런 나날들이 끝이 날까. 생각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고 지칠 때 쯤이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생활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허탈하게 끝나 버렸다. 한달이 넘도록 연락조차 없던 쿠시나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게 말야, 갑자기 마을로 가게 되었던 거라서. 하하, 싸운 뒤라 본인도 단단히 골이 나서 메모만 남겨 놨다는데 그게 사라진 모양이야. 난 아무것도 못 봤거든.」


돌아온 것은 쿠시나뿐만이 아니었다. 아이를 임신한지 이제 3개월째 접어 들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갑자기 마을로 가게 된 것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인주력이 임신한다는 것은 중대한 사항이었다. 특히 임신 초기와 출산시에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미수의 차크라가 뒤엉켜 아이와 인주력 모두 위험해 질 수 있고, 최악의 경우 미수가 풀려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출산의 경우 나뭇잎 마을에서 치루기로 벌써부터 이야기가 되어 있었지만, 임신 초기에 아이와 인주력을 보호하고 안정시키는 것은 소용돌이 마을이 훨씬 견고한 술법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이런 중차대한 사항을 한쪽 마을엔 알리지도 않은 채 단독으로 운신을 결정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미나토와 사이가 안 좋은 시기였다는 점과 쿠시나의 저돌적인 성격이 빚어낸 일이었다. 쿠시나는 소용돌이 마을에 가서도 미나토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자, 두고 보자며 보이지 않는 자존심 싸움까지 하고 있었다고 했다. 어쨌든 덕분에 쿠시나가 돌아온 날 바로 조금 늦은감이 있었던 결혼식 날까지 잡아버린 상태였다.


「다음 주야.」


미나토는 정말로 행복하단 얼굴로 밝게 웃었다. 카카시와 함께 있거나, 카카시와 관련된 일로는 잘 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잘 됐네요. 축하합니다, 호카게님.」


암부의 가면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눈은 떨렸지만, 축하만큼은 진심이었다. 카카시는 하달받은 임무가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호카게실을 빠져 나왔다.

굳이 미수나 임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소용돌이 마을과 나뭇잎 마을의 협력관계가 깨지지 않는 이상 쿠시나가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나토도 우선 그때까지 기다려보자고 생각하고 있던 눈치였다. 카카시가 느낀 허탈함은 정작 자신은 그동안 이런 당연한 사실들을 제대로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휘둘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었다. 어쨌든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고, 또 돌아가야 했다.

카카시에게 남겨진 것은 죄책감뿐이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의 가책. 카카시는 자신의 감정과는 별개로 쿠시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밝고 활달한 성격에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웃음이 번지게 만드는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조금 서운한 감도 있었지만 미나토가 푹 빠져 있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어느 면을 봐도 쿠시나는 자신과는 정반대였다.

그런 사람에게, 그것도 아이까지 가진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란 말인가. 조금도 변함없이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얼굴을 이제부턴 매번 기만하며 살아야 했다. 죄의식을 속에 감추고, 남편의 제자라는 얼굴을 해야 했다. 카카시는 괴로움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잔인한 현실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한가지 더 남아 있었다.

태어날 아이는 어떤 얼굴로 봐야 할까. 그 아이에게 무엇이 되어줄 수 있을까.



***



눈을 뜨니 이제 막 해가 자취를 감춘 초저녁이었다. 쉬는 날 책이나 보다가 늘어지게 낮잠을 잔 것 치고는 몸이 무겁고 머리도 개운하지 않다. 아무래도 오래전의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꿈자리조차 뒤숭숭하게 만들어서일테지만.

시간이란 것은 참 신기하다. 솔직히 많이 잊고 지냈었다. 나루토의 선생이 되고 나서 전혀 떠올리지 않았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것도 초반에 잠깐 그랬을 뿐이었다. 나는 결국 나루토는 나루토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분명 그랬다. 나루토가 고백해 오기 전까지는.

그 당시 한참 괴로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내 감정은 선생님에 대한 원망보다는 내 자신에 대한 자책감에 가까웠다. 그에겐 그 시간들이 연인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해프닝 중 하나였겠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것은 악몽같은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를 받아들였던 나를 끊임없이 저주했다. 품었던 불손한 마음, 끝까지 감추지도 못했던 미숙함, 잠시나마 부렸던 욕심까지 모두 다. 그 이상 스스로가 추악하게 느껴질 수는 없었다.

그 후 얼마 가지 않아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리고나서야, 나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능숙하게 옭아 매었지만, 결국 그것은 어린애가 떼쓰며 안겨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굳이 실연당한 슬픔같은 것이 아니어도, 닌자라면 한번쯤은 겪는 상실과 고독함마저 잠시도 견디기 힘들어 했던 나약함이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정도의 투정은 참아 주었다면 좋았을텐데. 그 정도의 외로움은 스스로 견뎌 주었다면 좋았을텐데. 내가 모든 것을 참고 견뎌냈던 것처럼.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일이었다.

내 진심은 몇 번이고 짓밟혔다. 정말 내 마음을 이해했다면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는 않았을테니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가. 사람이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는가. 새삼 답이 돌아오지 않는 질문에 나는 몸서리친다.

지금의 나루토도 이런 기분일까. 복수심같은 건 조금도 없었는데…, 낮에 들었던 나루토의 목소리에 언젠가의 내가 떠올라 기분이 묘해진다. 뭐, 얄궂긴 하지만 그래도 한번의 경험은 더 나은 선택을 낳는 법이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아.
두 번 다시.



.



간단히 샤워를 하고 환기도 시킬 겸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어느새 까맣게 가라앉은 밤하늘에 별들이 떴다. 침대에 푹신하게 몸을 맡기고 습관처럼 이챠파라를 펼쳐 들었을 때였다. 기척은 숨길 생각도 안 하는 녀석의 기운이 창쪽을 향해 들이닥치는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옮기자 예상대로 등장하는 익숙한 인영.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침대 끝으로 떨어지는 무게감과 불쾌한 출렁임. 왜 이런 것마저 닮았느냐고, 입 밖으로는 낼 수도 없는 원망이 금발머리를 향해 치솟는다.  


“카카시 선생님!”

“…아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언가 단단히 결심하고 온 얼굴이다. 어떤 결론이든 내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모습. 뭐, 나도 바라는 바이다.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로 지낼 수는 없으니까.

내 양 다리 위로 어설프게 걸터앉은 나루토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난 정말, 납득을 못 하겠다니깐요.”

“세상 모든 일을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특히 너라면 더 그럴텐데.”

“선생님도 나 좋아 하잖아요!”

“하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안다는 거야?”


어이없다는 듯 작게 조소를 섞어 반문하자, 나루토의 고개가 푹 꺾여 떨어졌다.


“그러니까… 왠지 그냥, 알 수 있다구요….”

“그래, 좋아해. 제자로서. 그걸 착각하면 곤란하지.”


나루토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곧 녀석의 몸이 손 끝부터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억울함, 혹은 분통함을 꾹꾹 눌러 참는 모습. 이윽고 나루토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루토의 눈빛은 섬뜩할만큼 변해 있었다. 나루토는 자세를 고쳐 내 몸 위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


“내가 정말 많이 생각해 봤다니깐요. 어떻게 하면 선생님을 가질 수 있을지.”

“…그래서?”

“거절할 수 없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니냐니깐요.”


내 표정이 조금은 흔들렸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드러나 있는 오른쪽 눈만큼은 완벽하게 평온을 위장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나루토. 뭐, 네가 그걸 알리는 없겠지만. 나는 심드렁한 눈빛을 유지하며 코 끝의 복면을 조금더 끌어 올렸다.


“그래서 더 더 깊이 생각해 봤죠.”

“그것도 안 통하면 끝이라는 거네. 그럼 말은 필요 없으니 얼른 해봐, 나도 얼른 끝내고 싶으니까.”


나루토는 금세 도발 당해 내 손에 들려있던 책을 빼앗아 협탁 위로 던져 버렸다. 푹신한 베개에 기댄 채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각도로 있던 내 상체는 나루토가 어깨를 누르는 힘에 완전히 내려 앉았다. 점점 흥분해 가는 나루토의 눈빛은 광기마저 깃들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깨를 누르는 나루토의 양 팔을 잡고, 낮에 그랬던 것처럼 손에 차크라를 모았다.


“겨우 이거야? 비키…”


하지만 나루토는 아까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준 채 멈춰 있자, 웃음이 나루토의 입가를 비틀며 솟아 나왔다. 


“이럴 줄 알았다니깐요. 되지도 않는 위협 하지마요.”


나루토가 내 팔을 하나씩 떼어내어 머리 위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열에 뜬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선생님은 날 해치진 못할 게 분명하다니깐! 얻어 터지는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선생님은 그 것조차 못 하잖아요.”


나루토의 손은 어느새 옷 안으로 파고 들어와 이곳 저곳을 훑어내기 시작했다. 몸에 화상자국이라도 남길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강렬하고 열이 오른 손길. 확실히 곤란한 상황이긴 하다. 작은 접촉에도 곧잘 빨라지는 심장과 금방 뜨거워져 버리고 마는 몸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으니까. 이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으니까.


“나룻… 아!”


가슴의 빳빳하게 솟은 돌기를 나루토의 손가락이 지분거렸다. 미처 숨기지 못한 반응을 나루토는 놓치지 않았다.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 내친김에―라는 느낌으로 복면까지 벗겨낸다. 온도가 높아져 있던 피부가 공기중으로 나오자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든다. 입술이 마른다.


“자, 선생님은 어떻게 할 거냐니깐요? 내가 이대로 선생님을― 강제로 안는다면.

어차피 거부하진 못 할테고.“


열과 오기가 뒤섞인 푸른 눈동자를 향해 나는 약간의 난색을 표했다. 나루토는 으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그리고, 더 이상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입술을 부딪혀 오는 얼굴 위로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졌다. 왜 16년이나 지난 지금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나를 가두는 힘에서 나는 왜 도망치지 못하는 걸까.

다시 발걸음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놀랍게도, 그 후로도 몇 번인가 찾아왔다. 처음과 똑같은 모습으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잘 자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물었다. 나한테 오는 이유가, 나에게 이러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그는 알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라며 웃었다. 가끔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때가 있다고 속삭였다. ‘어떤 것으로도’. 그 안엔 나도 있었다. 가족도 하지 못하는 것을 나라고 해줄 수 있을리 없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임시방편일 뿐인, 아무것도 남지 않는 관계. 아니, 한 가지 남은 것은 있다. 지금까지 살아 남아 이렇게 과거 속에서 허덕이는 나.

불행중 다행으로 그는 그렇게 간혹 찾아오기만 할 뿐, 더 이상 날 안지는 않았다. 숨이 막힐 정도가 되어서야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키스가 전부였다. 나는 한계였다. 그 선을 넘어가 버리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또 안길 수 밖에 없었겠지만, 그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그도 그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거다.

나루토의 말이 맞다. 나는 나루토를 상처 입히면서까지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한번도 저항하지 않던 몸에 힘을 주었다. 마음 먹고 비틀어 빼내는 손목은 쉽게 풀려났다. 마지막으로, 어깨를 밀어 입 안을 휘젓고 있는 혀를 떼어냈다. 내 선택은 하나 뿐이야, 나루토.


“……죽을 거야.”


호흡은 상당히 흐트러진 상태이지만 나는 여전히 재미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진심이다. 나루토의 눈이 놀란 듯이 잠시 커졌다가, 곧 자신만만한 빛을 띠었다.


“내가요? 선생님한테? 하,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거냐니깐요? 선생님이 나를 죽일 수 있을 리가―”

“그게 아냐, 나루토. …널 죽인다는 말이 아냐.”

“그럼…?”

“제자한테 강간 당한 수치심을 갖고서 멀쩡하게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무엇보다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테니까.”


나루토의 눈은 아까보다 더욱 커졌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던 입술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머리를 쥐고 흔드는 경악스러움이 한동안 머물다가 물러가자, 이번엔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파란 눈에서 절망이 쏟아져 나온다. 점점 일그러지는 미간과 잇사이에서 비틀리는 입술.


“그렇게…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내가 싫은 거냐니깐요…?”


나를 농락하던 혀보다도 더 뜨거운 눈물이 내 볼 위로 떨어져 흘렀다.


“어떻게 그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니깐요? 나한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고요! 나는… 난 단지… 선생님을… 으흑…, 윽…”


말이 결국 흐느낌으로 변한다. 쉴새 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뜨거운 비라도 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양 손은 여전히 내 어깨를 짚고 있지만 어느새 힘이 죄다 빠져 있었다. 격렬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나루토와는 달리, 내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투기를 완전히 상실한 나루토를 밀어냈다.


“뭐, 이제라도 진심을 알아주니 다행이네. 이만 돌아가.”

“………”


원망할 힘조차 잃어버린 나루토에겐 비통하고 넋빠진 표정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유령이라도 보듯 내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는 시선 끝에서, 나는 보란 듯이 손등으로 입술을 훔쳐내었다.


“비켜 줘. 양치라도 해야겠어.”


나루토의 눈이 상처로 한번 더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곧,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열정과 마음을 모두 놓아 버리는 공허한 얼굴. 나를 포기하는 표정. 그래, 이걸로 된 거다.

내 움직임에 하릴 없이 몸을 피해주는 나루토를 뒤로 하고 욕실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궜다. 잠시간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곧 기운없이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멀어져 가던 나루토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신호라도 받은 듯이 다리에서 힘이 빠져 나간다. 나는 욕실 문에 기댄 채 주저 앉아 버렸다. 

미안….
미안하다, 나루토….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날… 용서 하지마….

눈 앞에서 무너져 내리던 나루토가 떠오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을만큼, 나는 정말 훌륭한 닌자가 되었다. 그 때도 이렇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지금 나루토에게 갈 수 있었을텐데….

오른쪽 눈에서 무언가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느낌은 꼭 나루토가 흘렸던 것만큼 뜨겁다.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 얼마나 괴로워 하고 있을까. 상처 받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머리가 어지럽다. 가슴을 쥐어짜듯 두들겨 보아도 심장이 조이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터지는 숨을 목 안으로 눌러 참는 와중에도 전해질 수 없는 진심들이 하나하나,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나루토가 알게 될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닿았던 입술이 아직도 이렇게 뜨거움을
절망하던 얼굴이 견딜 수 없이 아파 밀어냈다는 것을
나를 놓아 버리던 그 마지막 표정이,
붙잡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슬펐음을….







-Fin







 

2012. 6. 16.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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