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길이 있긴 한건지 의심스러울만큼 나무가 울창한 숲을 미친듯한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상처투성이인 그 소년의 은발은 옅은 핏기를 품고 휘날린다. 귀 양옆으로 쉭쉭 스치는 날카롭고 차가운 공기. 발이 땅에 닿는지 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임에도 소년 스스로가 느끼기엔 누군가가 발을 잡아 끄는 것처럼 몸이 무겁다. 그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른다는 건 소년에겐 사치에 불과했다.

소년의 등에 축 늘어진채 업혀 있는 동료는 점점 차가워져 가고 있었다. 소년은 동료를 업은 손에 꾸욱 힘을 주며, 넘어가지도 않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미 한계를 넘어선 속도로 달리면서도 소년은 단 한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만큼이나, 죽을 힘을 다해 바라고 또 바랐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이렇게 죽으면 안 돼, 린!」





[린/카카시] 지키지 못한 것
written by pathos.






수 많은 손실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인계대전이 마무리 되고 다시 평화가 찾아오는 시점, 츠나데는 매일을 새로운 약 제조법을 구상하며 지내고 있었다. 전쟁을 통해 전설의 3닌자라고 불리게 된, 그것도 이렇게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츠나데의 진료실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칠 수 있는 배짱을 가진 닌자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어도 누구나 한번쯤은 문 앞에서 멈칫하게 되는, 그녀는 그런 위치의 닌자였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중요한게 아니라는 듯, 보란 듯이 누군가가 진료실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문을 부수다시피 등장한만큼 요란한 다음 행동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츠나데의 예상과는 달리 진료실은 조용했다. 영원히 진정되지 않을 것 같은 거친 숨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츠나데는 의아함을 느끼면서, 그리고 문이 부숴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찌푸린 인상을 지우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ㅡ
지금까지 보아온 수많은 얼굴들 중 가장 끔찍하고 절망적인 표정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앞뒤 가리지 않고 급하게 들이닥친 소년은 할 말을 잃은 듯,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츠나데 또한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무거운 절망감에 같이 짓눌려버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온 몸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소년의 표정은 13살의 남자아이가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짧은 정적의 시간동안 절망감 속에 온 정신이 갇혀 있던 소년은 문득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목적지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겨우 떠올렸다.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현실에 소년의 눈은 이윽고 물기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덜덜거리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떨리는 작은 턱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절규였다.


「살려줘요!!!!!!! 린을… 살려줘요!! 제발…!! 제발요, 츠나데님….」

「알았으니 안쪽 수술실로 데려와! 어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년은 츠나데보다도 먼저 수술실로 연결된 문을 부수듯 열고 들어갔다. 츠나데의 진료실에 딸린 작은 방이었지만 기기나 장비는 마을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아주 특별하거나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수술이나 실험이 아니면 쓰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거침없이 수술대로 다가가 등에 업고 있던 작은 소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눕혀놓은 소녀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은 어느새 물기가 말라있었다. 눈물이 날 정신적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다. 살 수 있어. 반드시 살 거야. 츠나데는 소년의 눈빛에서 스스로에게 희망을 되뇌이고 있는 간절함을 느꼈다.

소녀는 외적으로는 큰 부상이 없어 보였다. 입가에 흘러 굳은 피를 보아 내상이 심각한 것임이 분명했다. 더욱 비관적인 것은 소녀의 챠크라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소진되었다면 바로 즉사했을 것이다. 다행히 미세한 양이 남았고, 소녀는 죽음대신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치료를 견뎌낼 체력조차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카카시…. 린은 나한테 맡기고 지금은 나가 있어라.」

「…….」

「얼른. 시간이 없어.」


소녀의 상태와 예후를 가늠해 보려고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소년에게 츠나데는 아무 것도 내비치지 않으려 애썼다. 굳은 얼굴로 단호히 눈짓하자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돌아섰다. 작고 지친 등이 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츠나데는 곧 수술대 위로 시선을 돌렸다. 손에 모은 챠크라로 내상을 치료하기 시작하면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제발 버텨주렴.

진료실로 나온 소년은 넋이 반쯤 나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자신이 할 수 있었던 일이 하나라도 있기나 했던 걸까? 어째서 항상 이런 식일까.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잠시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죄책감과 임무에서의 상황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을 떠돌기 시작했다.


.
.
.


전쟁이 남긴 것은 비극뿐이었다. 국가나 각 닌자마을들은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화해했지만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물밑으로는 치열한 눈치싸움과 머리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정치적 문제와 관계없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단독행동을 하거나,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살육의 광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날뛰는 무리들 때문에 국지적이고 산발적인 게릴라성 전투도 끊이질 않았다. 모든 나라가 여전히 병력손실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닌자들은 쉴새없이 임무나 전투에 불려다니고 있었고, 때로는 기본적인 포메이션도 갖추지 못한 채 작전에 투입되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미나토 반도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대체할 인력이 없어 오비토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상급닌자가 두명이라는 사실 때문에 남은 세명조차 칸나비 다리 전투때처럼 따로 행동해야 하는 임무로 배정되기 일쑤였고, 다음 호카게로 미나토가 내정되면서부터는 더더욱 미나토, 그리고 카카시와 린은 분리된 유닛처럼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해온 것에 비하면 이번 임무는 매우 손쉬운 측에 속했다. 적진에서 부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나뭇잎 닌자들에게 의료닌자인 린을 데려가 치료하고 같이 귀환하는 임무였다. 통제되지 않는 몇몇 무리들에게 당한 것이었지만 은밀한 임무로 파견되었던 터라 공식적인 신변보호는커녕 몰래 되돌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부상자들은 은신처를 확보한 상태였고, 위치가 불의 나라에서 크게 벗어난 곳도 아니었다. 가는 경로에 지형적 어려움이나 싸움 등 이렇다 할 위험도 없었다. 전투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린과 제상태가 아닌 부상자들을 오고 가는 길에 보호하는 것이 카카시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이 이상 떨어지지마, 린.」

「응. 근데 카카시, 이거….」


카카시는 말없이 방금 제 손으로 죽인 닌자를 내려다 보았다. 무언가 정보가 잘못되어 있었다. 분명 경로를 포함해서 이 일대는 이렇게 적이 많은 상태가 아니어야 했다. 부상자들에게서 연락을 받고, 그것이 임무로 하달되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 곳이 새로 격전지라도 된 것인지. 아주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원인이 아니라 이대로 가다가는 두 사람으로는 감당이 힘들어진다는 것이었다. 사실 격전이란 말도 무색할 정도로 그저 ‘자신의 편’이 아니면 무조건 잡아 죽이는 일방적인 린치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이쪽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린이 부상자들을 치료하도록 하고 머릿 수를 늘릴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도 은신처는 멀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은신처에 있던 부상자들은, 이미 모두 죽어 있었다. 추적을 따돌리는 데 실패했거나 장소를 들키고 기습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처참하게 흐른 피가 아직 제대로 굳지도 않아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코가 예민한 카카시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목에 손가락을 대어 맥박이 멈춘 것을 확인한 카카시가 조용히 시체의 눈을 감겨주고는 린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린도 마지막 시체 앞에서 암울한 표정으로 카카시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이렇게 되면….


「여기 계속 있는 건 너무 위험해. 어서 벗어나야 돼.」

「잠깐, 카카시. 너라도 치료하고 가자.」


카카시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상태를 훑어 보았다. 자잘한 찰과상과 타박상들이 대부분이었다. 발목에 감아둔 붕대가 젖을 정도로 피가 흐른 한 쪽 다리가 그나마 가장 심한 상처였다. 굳이 치료할 필요는 없는데. 카카시는 거절하려고 고개를 들었지만 자신의 다리에 걱정 가득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린을 보고 체념했다. 말려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챠크라 양때문에라도 끝까지 거절했겠지만, 어차피 공짜로 챠크라를 얻은 셈이니 이 정도는 상관이 없었다. 카카시는 대답대신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상처는 깊지 않은데, 바로 지혈을 안해서 피를 너무 흘렸잖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치료 받을 때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이건 원래 내 역할-」


작게 긁힌 상처까지도 놓치지 않고 밴드를 붙여주려는 린의 팔을 카카시가 갑자기 세게 잡았다. 린이 놀라서 쳐다 본 카카시는 고개를 바깥 쪽으로 돌리고 기척을 살피고 있는 채였다. 린의 시선을 느꼈는지 카카시는 다른 한 손의 검지손가락을 입술로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를 했다.


「빨리 나가는 게 좋겠어.」


한참을 바깥 상황을 살피는 데에 집중하던 카카시가 읊조렸다. 린도 큼지막한 상처들을 치료한 것에 만족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적어도 올 때보다 상황이 좋아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카카시는 오감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채 린과 함께 은신처를 벗어났다.


.
.
.


「린, 뒤쪽!」


린을 향해 날아가는 수리검을 급한대로 낚아챈 카카시의 손에서 피가 진득하게 베어나왔다. 젠장. 카카시는 보이지 않게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었다. 머릿수, 주변에 관한 정보, 체력적인 조건까지 모두 다. 게다가 린이 의료닌자라는 것을 알고 작정하고 린만을 노리는 공격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의료닌자지만 린도 기본적인 전투가 가능하고, 다행히 지금까진 회피 위주의 방어를 잘 해내고 있었다. 카카시는 그런 린을 보호하며 적의 술법을 간파, 차례로 쓰러뜨려 나갔다. 그렇게 해치운 게 세명. 남은 건 두명. 개개인으로 보자면 그렇게 대단할 게 없는 무리들이었다. 하지만 린이 언제까지 버텨줄 수 있을지. 린은 눈에 띄게 지쳐가는 데다가 자잘한 상처들이 늘고 있었다. 그리고 챠크라 양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 카카시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이 녀석부터 찾아야 해. 멀리 떨어져 숨은 채로 사방에서 각종 무기를 날려오는 놈 때문에 엄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위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쉴새 없이 장소를 옮겨다니는 통에 무기가 날아오는 방향을 그때그때 파악하는 것은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았다. 집중공격 받고 있는 린이 일일이 알아채고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카카시는 아까부터 방향이 변하는 패턴을 읽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다음엔 저쪽이다. 상대의 다음 행동을 읽어낸 카카시는 곧 돌아오겠다는 뜻으로 린에게 눈짓했고, 린도 버틸수 있다는 신호로 답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뒤쪽에서 날아오던 수리검들이 순식간에 카카시의 등과 머리에 차례로 박혔다. 그 모습을 본 린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잠시. 곧 약간의 소음과 연기가 일더니 카카시가 있던 자리에는 수리검이 박힌 나무토막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제길, 그 꼬맹이 자식 갑자기 어디로 숨은 거지?」

「여기다.」


린과 카카시, 그리고 자신의 동료가 있는 곳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나뭇가지를 박차고 뛰어 오른 적을 향해, 카카시가 정면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카카시의 오른 손에는 눈에 보일정도로 형체화된 챠크라가 귀를 찢을 듯이 꿈틀 거렸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상대는 뇌절을 피하기 위해 체인을 근처 나무에 걸어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쳇, 짧게 혀를 찬 카카시도 옆 나무 기둥을 디딤대 삼아 방향을 바꾸어 상대를 쫓기 시작했다. 카카시가 스쳐간 곳마다 챠크라에 베인 나뭇가지들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몸을 숨겨 위치를 알 수 없을 땐 애를 먹긴 했지만 처음부터 적수가 될 실력은 아니었다. 직접 대면한 후로는 판단능력과 움직임, 속도까지 카카시가 한 수 위였다.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쳐두는 트랩이나 얕은 공격들을 죄다 피해낸 카카시는 상대가 멀리 벗어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었고 가차없이 뇌절을 꽂아넣었다. 크헉,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는 피를 잔뜩 쏟아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꺄아악!」


상대의 가슴에 박힌 팔을 빼내기도 전에, 린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카카시는 경악할 새도 없이 내달렸다.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린은 바닥에 넘어진 상태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공격을 맞고 꽤나 멀리까지 날아간 것인지, 거리가 벌어져 있는 적이 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의료닌자니 데려가려 했는데 말이지, 너무 망가뜨려 버려서… 어차피 곧 죽을 것 같네?」


뇌절은 이제 쓸 수가…. 상대가 린을 향해 큰소리로 거들먹거리는 말을 어렴풋이 들으며 카카시는 생각했다. 남은 챠크라 양은 거의 없었다. 포켓의 수리검도 바닥난 상태. 그렇다고 망설일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카카시는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소리도 죽인 채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린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와중에도 나무 기둥에 박혀 있는, 방금 처리한 녀석이 던졌던 수리검을 뽑아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지치긴 했지만 움직이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는데. 아마 비명을 들었을 때의 공격이 타격이 컸던 모양인지 린은 다가오는 상대를 보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고 있었다. 서클렛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그 닌자는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린의 앞에 섰다.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려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찰나. 린은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최후의 순간조차 잊지 않고 떠오르는 하나의 이름을, 그저 입술만 달싹이며 되뇌이고 있을 뿐이었다.


「카…카시….」


린이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린의 몸에 무언가 부딪혀 내렸다. 끄억, 하는 남자의 굵직한 괴음에 묻혀 버렸지만, 제길! 하는 외침이 분명 짧게나마 들렸다. 느껴져야 할 고통이 전혀 없자 린은 살며시 눈을 떴다. 방금까지 살기등등하던 적이 린쪽으로 고꾸라져 있었다. 그 위로는 카카시가 두 손으로 정확히 적의 경추에 수리검을 박아 넣고 있는 상태였다. 끄윽거리는 신음성이 계속 흘러 나오자 카카시는 이를 악 물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정말 한계까지 다다랐는지 평소답지 않게 손이 날쪽으로 미끄러져 아까 베였던 손에 더 깊은 상처가 새겨지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침내 상대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숨이 멎자 카카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잊고 있었던 벅찬 숨이 카카시의 기도를 타고 터질 듯이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여기저기가 저릿한 몸상태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린은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얼어붙어 있었다. 눈 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굳어 있던 린은 이윽고 카카시가 미소지으며 말을 걸자, 그제서야 현실을 실감한 듯 바닥에 주저 앉았다.


「하아… 린…. 괜찮은 거야?」


린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쪽에서부터 터진 듯한 피가 린의 입가에 흘러 있었지만, 카카시는 안심했다. 의료닌자들은 전투시에도 최대한 챠크라를 아낄 수 있도록 교육 받는다. 인술을 이용하는 것보다 체술을 바탕으로 한 회피기를 위주로 배우는 것도 챠크라를 아끼기 위한 방편이다. 동료들이 다쳤을 때에 치료하는 것이 기본적인 역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료닌자에게 있어 자신을 가장 잘 지키는 방법 또한 의료인술을 이용한 자가치료였다.

내상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치명적인 수준임에도 린이 자신을 안심시키려 별일 아닌 듯 굴고 있다는 것을 카카시는 알고 있었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면 목숨도 위태로울 것이었다. 그래도 은신처에서 부상자들 치료도 하지 못했고 지금까지 비축해둔 챠크라가 충분히 있을테니 지금부터 치료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일단 눈에 잘 안띄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돼. 주변 장소를 두리번거리던 카카시는 땅이 빙글 도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증상들이 급격하게 몸을 덮쳐왔다. 생각보다 피가 많이 흐른 것인지 팔의 움직임도 엄청나게 둔해져 있었다. 묵직하게 움직이는 손으로 짚어낸 이마는 어느새 불덩이처럼 뜨겁게 열을 뿜어낸다. 온 몸이 저릿저릿 했다. 사륜안 때문인가…. 린이 회복하는 동안 충분히 쉬어 둬야겠어.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카카시는 린을 향해 한발 내딛었다.


「린, 부축해줄게…. 저쪽으로 옮겨…서 어서 네 치료를…」

「카카시!」


한순간이었다. 머리가 심하게 어지럽고 지면 전체가 울렁거린다 싶더니, 어느새 카카시의 시야에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하늘이 들어와 있었다. 곧 당황한 표정의 린의 얼굴이 다시 시야를 메웠다. 손끝, 발끝부터 치고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졌다.


「하…. 몸이….」


몸이… 너무 뜨거워…. 왜 이러지? 카카시는 유독 묵직하고 감각이 없는 오른 팔로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피는 멈추고 굳어가고 있었지만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의지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같은 희미한 목소리에 카카시는 다시 린을 바라보았다. 열에 의해 웅웅거리는 이명사이로 린의 목소리가 서서히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독이야…. 무기에 묻혀 놓았던 게 틀림없어. 그런데 그렇게 움직였으니…. 카카시, 내 말 들려?」

「…하— 리…ㄴ…….」


어느새 숨쉬는 것조차 힘겨워졌다. 그 모습을 본 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와 알아듣기 힘들어지는 음성. 카카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입술이라도 깨물어보려 했지만 자신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본 적이 있는 독이야…. 원래 무색무취라, …알아채기 힘들어. 시간이 없어…. 지금부터 바로 치료해야 해.」

안돼….

「카카시, 걱정하지마….」

린.

「내가, …내가 살려줄게. 이번엔 내 차례야.」

네가 먼저야…. 너도 이대로는….


린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카카시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말하는 중간중간 린이 자신의 고통을 참는 듯한 간격이 느껴졌다. 급한 건 린이었다. 그런 부상을 입고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의료인술이라니. 게다가 챠크라를 해독하는 데에 다 써버리면…. 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힘을 써서라도 린을 막고 싶은데 하필이면 손끝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니.

근처의 큰 나무와 풀 숲으로 인해 짙게 그늘이 내린 곳으로 린이 카카시를 옮겨갔다. 몸이 질질 끌리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카카시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독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는 것인지, 눈물이 나고 있는 것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순식간에 숨통이 끊겨 죽기라도 하지. 어떻게 해볼 수도 없게.

뛰어나다고 추켜세워지는 것도, 임무에서 가장 많은 역할을 담당하는 것도, 다른 팀원들을 커버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도,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다. 힘겨울 때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몫과 역할을 해내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 해왔다. 그런데 왜. 어째서 결정적인 순간엔 항상 이 모양이야. 왜 내 존재가, 내가 있는 이유가, 가장 빛을 발해야 하는 순간에 오히려 도움받아 버리는 거야. 그것도 내 손으로 지켜야할 생명을 갉아먹어 가면서.

마비된 신경에 신체적인 감각은 없었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린의 챠크라가 조금씩 몸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린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어라 말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신이 자꾸 희미해져 갔다. 카카시는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말리기는커녕 린에게는 닿을 수 조차 없는, 정신적인 절규였다.


하지마….
치료해주지 마.
나같은 건…

약속했단 말이야.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겠다고….


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투둑, 불규칙한 간격으로 뺨에 점점이 내려 앉는 아주 희미한 압력이, 모든 감각에 암막이 드리우는 마지막 순간에 카카시가 느낀 것이었다.


.
.
.


카카시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절망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가만히 자신의 오른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하게 감겨있는 붕대.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도 치료를 하고 있었는지 린은 카카시의 몸에 엎드린 채로 혼절해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같은 건 어떻게 되도 상관이 없었는데.
이미 한번 등을 돌렸던 그 순간부터… 오비토에게도, 너에게도, 난 구원받을 자격이 없었는데….
이렇게 살아날 자격 같은 건….

이대로 린이 깨어나지 못하면—

순간,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차오르는 분노에 카카시는 숨을 멈추었다. 온 감각이 부서져 내리는 듯한 혼란스러움에 구원의 손길이라도 바라는 듯 수술실의 문을 쳐다보았다. 다시 달려가서 문을 두들기면서라도, 꼭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싶어졌다. 뭐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게 뭐든—



츠나데는 진료실로 통하는 문 앞에서 벌써 몇분째 망설이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나가서 자신이 카카시에게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답이 너무 명백함에도 받아들이기 싫어 답지않게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이미 벽 한쪽이 부서질만큼 화풀이라도 했을테지만…. 어차피 린의 상태를 처음 본 순간부터 어느정도 예견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치료하겠다 했던 것은 이 역할도 맡아주겠다는 각오였다. 츠나데는 입술을 한번 꾸욱 물었다.

조심스럽게 연 문 사이로 한발짝 내딛었을 때, 기다리지 못해 이제 막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카카시가 눈에 들어왔다. 카카시는 자신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카카시의 시선이 자신의 발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가슴으로, 천천히 올라왔다. 기대도 두려움도 희망도 절망도 아닌… 아니, 그 모든 것이 뒤섞인 눈빛에 츠나데는 주먹을 꽈악 쥐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카카시와 눈을 마주쳤다.


「…….」

「……장례는… 제대로 치러주마…. 미안하다….」

「…….」


카카시는 울지 않았다. 그저 꾸벅, 말없이 츠나데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카카시의 눈은 눈물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 빛을 잃은 밤처럼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었든, 네 잘못은 아니야…. 츠나데가 덧붙인 말도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오비토….

츠나데는 카카시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무언가 반응을 해주려 했지만 카카시는 자신이 방금 말을 했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처럼 넋이 나가 있었다. 츠나데는 당분간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카카시도 살펴봐 주고 싶었다. 그러나 천천히 발길을 돌려 진료실을 빠져나가는, 무겁게 내려앉은 그 뒷 모습에 끝끝내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fin.







2012. 9. 15.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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