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무슨 말이냐는 듯 노려보는 검붉은 눈동자를 무심하게 되받아 치면서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는다. 답을 갈구하던 그와 꼭 닮은 눈을 하고 있는 사내는 나즈막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검붉은 눈동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곧 쿵하는 소리와 함께 방안의 공기가 한순간 요동친다. 그리고는 정적이다. 언제나 찾아오는.

사내가 남긴 타액의 여운이 입가를 맴돌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저 똑같은 모래일 뿐이다.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애당초 아무것도 없다. 약한 바람에도 손가락 사이로 바스라져 흘러 내리는 메마른 모래. 가득 쥐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확실하게 부피가 줄어든다. 욕심만큼 모아 둘 수도 없다. 부질없는 짓이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지 않고 흘러가 버리는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게, 그렇게도 억울한 일일까.

생명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회색빛의 방. 몸 하나 뉘이면 가득 차버리는 침대와 무채색의 시트, 벽지. 그리고 하나같이 검기만한 몇 안되는 가구들. 회색의 이 방이 내 머리카락… 아니, 나와 닮았다고 누군가가 그랬던 것 같다. 세상에 셀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색깔이 있다고는 절대로 인정할 것 같지 않은 칙칙한 커텐 사이로 저물어가는 붉은 태양빛이 들어온다. 빛을 받은 방안에 떠돌아 다니는 미세한 먼지들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어차피 다 같은 모래다.

쓰지도 않는 검은 책상 위에 무심코 눈길이 간다. 그 곳에는 태고적부터 밑바닥을 붙이고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은 담배 한갑이 있다. 3개월. 담배가 처음 이 방에 들어와 지금까지 있었던 시간이다. 그가 이 곳에 있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어느날 그는 피우지도 않는 담배 한갑을 사가지고 왔다.

「담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거야?」

「사라질 바람.」

동문서답이었다. 영문은 몰랐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아니, 왠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와 한 달동안 같이 살면서, 그리고 그 전에 내가 일하는 바(bar)에 오는 단골손님으로 알고 있을 때에도 단 한번도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그는 분명 흡연자가 아니었다.

낯설었다. 그날 내 눈 앞에 서 있던 그는 아주 능숙하게 담배곽 위쪽의 비닐을 벗겨내고, 안쪽의 은박 종이도 뜯어 내버렸다. 그리고는 한개피를 꺼내서 역시나 능숙한 동작으로 불을 붙였다. 회색의 내 방에 그의 회색 담배 연기가 퍼졌다. 내가 알고 있었던 그 우치하 이타치가 맞는 건가. 한달동안 거의 매일같이 나와 몸을 섞던 그가 맞는 건가. 그 낯설음이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날 짓눌렀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담배 하나가 다 타 없어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재떨이 같은 것도 키울리가 없었던 내 방에서 그는 필터 가까이 타들어간 담배를 처음 벗겨낸 비닐과 은박 종이위에 비벼 끄고는 그와 나 사이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렸다. 잠깐이지만 자신의 입으로 물고 빨았던 물건에 대한 일말의 정도 의미도 없다는 듯, 냉정하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시선을 내려 쓰레기통 안을 들여다 보았다. 구겨진 담배와 뭉쳐있는 종이가 말 그대로 ‘쓰레기’처럼 처박혀 있었다. 그 모습에 안타까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날 서서 내려다 보던 녀석은 그 길로 내 방을 나갔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단 한개비의 빈자리가 남겨진 담배는 그 뒤로 이 책상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미련은 아니다. 그가 인정사정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던 것에 대한 동정도 아니다. 동병상련의 감정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의미가 없다. 이 것이 책상위에 있든, 쓰레기통에 박혀 있다가 어느날 내 게으름에 변덕이 찾아 왔을때 밖으로 내다 버리게 되든 그게 뭐가 다르단 말인가.

3개월 동안 붙어 있던 담배를 손으로 들었다. 본드라도 바른 듯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는데, 가볍게 손에 들어온다. 한 손에 쥐어지는 이 감촉. 언젠가는 사라질 감촉. 손에 잡힌다고 해서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 그가 가르쳐 준 것이다. 몸소 모래처럼 부질없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면서 알려준 깨달음.

내게 가끔 이런 변덕이 찾아온다. 이유는 없다. 문득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일 뿐. 지금은 어쩌면 방금 이 방을 나간 그와 꼭 닮은 녀석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담배곽에서 담배를 하나 빼어 물었다. 라이터.. 같은 건 없다. 대충 침대 옆에 서랍을 뒤졌다. 일하는 바에 발에 차일 정도로 쌓여있는 성냥갑 몇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치익-

불을 붙이고는 한모금 깊게, 빨아 들였다.

“욱, 쿨럭-”

3개월이나 지나 향은 다 달아나고 산화될대로 산화된, 쓰디쓴 담배연기가 폐를 깊숙이 침투한다. 매운 연기에 눈물이 고인다. 난생 처음으로 온갖 유독물질이ㅡ그것도 공기에 변질된ㅡ 가득한 연기를 들여마신 대가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울렁거린다. 흡연자들에게야 그렇지 않겠지만, 처음 접하는 몸에는 마약이나 마찬가지다. 3개월이나 묵은 담배는 나날이 더 쓰고 독해지기만 했던 것인가. 쓰다. 미칠 정도로 쓰고 괴롭다.

당장이라도 다시 드러눕고 싶은 어지러움을 참아가면서, 구역질 하듯 쏟아지는 기침을 억누르면서, 고집을 부려 끝까지 타들어 갈때까지 몇번이고 연기를 들이마신다. 회색 연기가 회색의 방을 더 짙게 물들인다. 메마른 회색의 담뱃재가 모래처럼 바스라져 날린다. 그리고 똑같은 색을 하고 있는 무채색의 침대 시트에 잔뜩 떨어진다. 토할 것 같다. 그래도 멈추지는 않는다. 괴로우면서도 안하면 그만인 짓을 무슨 오기인지 끝까지 하고 있다. 이 것도 자학일까. 아까 그 녀석과의 대화가 생각난다.

그대로 날 원했다면 내 몸같은거야 얼마든지 내 주었을텐데, 그는 그걸 알면서도, 또 원하면서도 하지 않았다. 앞뒤 안가리고 갑자기 덮쳐서는 잡아먹을 듯이 키스를 해대다가, 몸에 힘을 뺀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의욕없는 눈으로 그저 멍하게만 있던 나에게 말했다. 부들부들 떨릴정도로 치솟는 화를 참는 목소리로.

「이렇게 살면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할 셈인가?」

「………」

「정말 이대로여도 상관없는 거야, 당신은?」

「………」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자기자신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거냐고!!! 하타케 카카시!!!!」

노려보는 그 눈빛에는 많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갖고 싶은 욕망, 형에 대한 원망, 나에 대한 안타까움과… 혐오. 녀석의 눈을 보며 그를 떠올린다. 그를 떠올리며 그가 떠나고 나서 알게 된 것도 떠올린다. 그건 그러니까,

「모래.」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애를 써야 한다는 사실조차 깨닫기 전에 빠져나가 버린다. 그렇다면, 오는 걸 막을 필요도 가는 걸 잡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손에서 몸에서 마음에서 힘을 빼고 그저 내버려두면 그만이다. 물론 이런 것까지 그 녀석에게 말해줄 의리도 친절한 아량도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나간 녀석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담배는 손끝까지 짧아져 있다. 별 생각없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가 내키지 않아 창문을 열고 밖으로 던져 버린다. 저물어가는 태양빛에 어질어질한 몸을 일으켰다.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매일같이 입는 깔끔한 흰색 와이셔츠와 살짝 라인이 들어간 검은 베스트. 어둡고 푸르스름한 조명에 흰 피부가 파랗게 질려 보인다. 조용히 음악이 흐르지만 귀기울여 듣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두운 조명 속에 표정도 마음도 적당히 숨기고 술잔에 한숨을 담는 곳.

작은 바에서 바텐더라는 걸 하고 있다보면 별별 녀석들을 다 보게 된다. 주인이란 놈은 얼굴도 잘 내비치지 않는다. 내가 봐도 애당초 이런 곳을 운영하기엔 너무 놀기 좋아하는 호걸이다. 그렇게나 여자를 밝히면서 밤에만 영업하는 바를 처음부터 왜 시작한건지 의문일 정도다. 덕분에 내가 주인인양 오픈과 마감은 내 재량이지만.

“어이 형씨, 당신 ………이거, 맞지?”

아까부터 내 눈치만 실컷보던 녀석이 어느정도 취기가 오르자 말을 걸어온다. 풀데 없는 욕정이 가득 쌓인 얼굴로 슬쩍 자신의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능글맞게 웃는다. 어디 소문이라도 난건지 아예 이걸 목적으로 오는 놈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뭐 어떤가. 그들한테나 나한테나 어차피 모래인 것을.

“맞는 것 같군.”

“호오…. 제대로 찾아왔네. 일은 언제쯤 끝나는 거지?”

“내 마음대로.”

녀석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내 무미건조한 말투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녀석은 금새 기대감에 찬 얼굴로 입맛을 다신다.

지금처럼 나에게 말을 걸어 오는 녀석은 하루에 한 두명씩은 꼭 있다. 거절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충 시간을 떼우다가 새벽에 마감을 할 때쯤이면 오히려 눈을 더 빛내며 각자의 개성이 담긴 신호를 하고는 밖으로 나간다. 바의 문을 닫고 나가면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다. 난 골목만 돌면 바로 있는 나의 집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다. 녀석들은 알아서 따라온다. 최근 3개월간, 거의 매일같이 그랬던 것 같다.

호기심에 건드는 놈도 있고, 철저하게 하룻밤 유희로 생각하는 놈도 있고, 어쭙잖게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려는 놈도 있다. 짧은 유희로만 생각했다가 섹스 후에 마음이 바뀌는 놈들도 더러 있다. 결과는 똑같다. 그들은 하나같이 메마르고 무감정인 나에게 기가질려 도망치듯 나가서 두번 다시 오지 않는다.

아무리 하룻밤이라고 해도 그 대가로 돈을 받는 창녀도 이렇진 않다고 했던가? 이름도 모르고, 이젠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녀석이 방을 나서기 전, 질렸다는 표정으로 했던 말이다. 분명 잠자리는 최고였지만 두 번했다간 자신까지 온 몸의 수분이 빼앗겨 말라 죽어 버릴 것같다고. 그렇다. 하룻밤 재미나 보려고 했던 놈들은 물론이거니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다가 당혹스러울 정도의 허무감을 느끼고 떠나던 놈들에겐, 나 또한 메마른 모래였다. 너무 건조해서 버석버석하게 형태도 없이 바스라질 것 같은 모래. 나에게 그 말은 칭찬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존재이길 바라니까. 난 어느새 그와 많이 닮아 있었다.

“이거, 소문이 정말이었군요. 그 젊은 애인은 어쩌시고?”

언제 왔는지 나와 아까 그 녀석의 대화를 엿듣던 놈이 어울리지 않게 예의를 차려 말을 건다.

“네 놈은 낯짝도 두껍군.”

“ ‘네 놈’이 아니라, 호시가키 키사메입니다. 내가 물어본 건 내 낯짝 두께가 아닐텐데요.”

“대답할 의무는 없지.”

그는 잠시 호기심 어린, 무언가 더 캐고 싶다는 눈길로 바라본다. 나는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할 뿐이다. 원래도 푸르죽죽한 혈색인 녀석은 조명때문에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여전히 기분 나쁜 녀석이지만 지금은 아무리 녀석이라고 해도 다를 건 아무것도 없다. 날 거쳐가든 피해가든 어차피 사라질 모래인건 마찬가지다.

“많이 변하셨군요, 꼬이는 벌레들을 내쫓긴 커녕 오히려 받아들이다니. 몇 개월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하던 일 아닙니까?”

“말이 많군.”

“나도 그 때 그 놈만 아니었어도-”

“뭔가 착각하는 것같은데. 이타치가 아니었어도 그 때 넌 내 손에 죽었을 거다.”

“지금은?”

“원하나?”

조용히, 그리고 똑바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말없이 있다가 역시나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치며 일어난다. 떨칠 수 없는 찝찝함이 남은 것처럼 작게 한숨을 쉬고 입을 씰룩거리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녀석의 말대로 애당초 난 실없이 찝적대는 놈들을 받아 줄만큼 아량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럴때마다 간단하게, 확실한 방법으로 놈들을 제압했었다. 그래도 그런 인간들은 지치지도 않고 어디선가 나타났다. 쉴틈없이 줄줄이까진 아니더라도, 잊을만 하면 꼭 한번씩 그런 놈들이 나타나곤 했다. 조용히 호텔 카드키따위를 내미는 놈들부터, 시덥잖은 저질스런 농담을 건네며 끈적한 웃음을 흘리는 것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얕보고 처음부터 힘으로 달려드는 부류들까지.

키사메는 마지막 부류에 속했다. 조금 다른게 있다면 지나치게 대담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으로 밀어부치려는 놈들도 기껏해야 바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 일하는 날 지켜보다가 수작을 걸며 팔을 잡아 당기거나, 내가 홀에 나가 있을때나 다가와서 위협을 했다. 아무도 바 안쪽의 내가 일하는 공간은 침범하지 않았다.

키사메는 막무가내였다. 새로 들어온 술들을 정리하느라 능청스럽게 걸어오는 말을 무시했더니 대뜸 바테이블을 타고 넘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벽쪽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밖이었다면 적당히 주먹이라도 날리고 패대기를 치면 그만이었지만, 장소가 좋지 않았다. 그 공간에 진열되어 있는 술병들이며, 무엇보다 지라이야가 자기 몫으로 빼놓은 술병들이 바로 발 옆에 있었다. 빈둥빈둥 하는 것 같아도 사장은 사장이다. 더군다나 그 술 좋아하는 사람의 술을 다 깨먹으면 얼마나 일이 귀찮게 될까. 이미 키사메가 움직인 여파로 키핑(keeping)된 발렌타인 한 병이 떨어져 깨진 터였다. 골치가 아프다. 푸르죽죽한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놈을 흐릿한 눈으로 보면서, 적당히 받아주는 척하며 이 공간을 벗어나는 게 덜 번거로운가- 술이야 어떻든 일단 하고 싶은대로 하고 지라이야의 잔소리를 듣는 게 덜 번거로운가- 따위를 계산하고 있었다.

생각이 깊었는지 순간 날아오는 녀석의 주먹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맞지도 않았다. 언제나 바테이블 한쪽에 조용히 앉아 술을 마시던 그가 어느새 들어와 키사메의 팔을 잡고 있었다. 웬만한 일엔 놀라지도 않는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의외였다. 이런 일을 몇번이고 보면서도 그저 방관하던 ‘조용한 단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였다. 푸른 조명 아래서도 빛을 잃지 않는 특유의 검붉은 눈동자가 나를 힐끗 보더니, 키사메를 향해 날을 드러냈다.

「꺼져라.」

「…애인이라도 되는 겁니까?」

「……」

「아니라면 상관마시죠, 이 자는-」

「이 이상 난동을 부리려면 나부터 처리해야 될 거다.」

그는 키사메를 잡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힘이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키사메는 잡힌 팔을 빼내며 이윽고 내게서도 등을 돌렸다.

「그렇담 이쪽 분부터 상대해 드려야겠군요.」

그렇게 나간 두명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일을 마치고 나갔을 때 밖에는 이타치 혼자 서 있었다. 한 눈에 봐도 상처 하나 없었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세를 졌군.」

웃어 보였다. 손님들에게 술을 내가며 짓는 형식적인 미소였던가. 아니면 그것과는 좀 달랐던가.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이젠 의미 없으니. 데낄라를 마시던 그에게서 나는 시큼한 레몬향이 코를 자극했다. 대답이 없는 그를 두고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그는 내 걸음을 좇아왔다. 막지 않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가 내 손을 마주잡고 누르면 그에 맞춰 침대에 몸을 뉘었다. 딱 그때까지다. 손을 잡고 있는 것은. 그의 손은 항상 금세 내 손에서 흘러가듯 빠져 나가 몸 구석구석을 탐했다. 몇 번이나 손은 그렇게 빠져 나갔다. 이상하게도 내게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느낌은 그가 애무하던 손길도 아니고, 키스하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던 뜨거운 입김도 아니고, 몸 깊숙이 들어오던 쾌감도 아니다. 내 손에서 그의 손이 빠져 나가던 느낌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질량조차 없는 것처럼ㅡ마치 모래처럼ㅡ 너무도 쉽게 빠져 나가곤 했다. 그 허(虛)한 감촉만이 잊혀지지 않는다.

손에 잡힌다고 해서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




 

2011. 9. 1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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