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림 - #7.



느른하게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정신마저 아연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휴대폰을 울리며 화면에 떠오른 번호는 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스팸따위로 분류하며 무시해 버릴 정도로 낯선 것도 아니었다. 관심도 없고 지긋지긋하기만 한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주말 오후. 딱히 약속도 없어 집에서 늘어져 있던 아스마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이 번호, 어디서 봤더라… 분명….


[아스마씨 휴대폰 맞죠?]

「네, 그런데요.」


아. 이 목소리는. 아스마는 대답을 하면서 깨달았다. 카카시의 오래된 연인, 우치하 오비토. 카카시를 빼면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녀석이었다. 카카시만 아니면 아무런 적대심도 가질 필요가 없는 녀석이었다. 만나고, 알게 될 일도 없었던 남자.

오비토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카카시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지만 함께 어울리게 되는 일은 없었다. 그냥 서로의 존재와 얼굴, 이름정도만 알고 있는 사이였다. 그것이 카카시가 의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비토 쪽과 자신과 가이쪽이 섞이게 될 일은 영영 없을 것이라는 느낌은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어 있었다. 자신과 가이가 카카시와 어울리는만큼 카카시는 오비토와 붙어 다니는 일도 많았다. ‘단짝 친구’같은 개념이라면 자신이나 가이보다는 오히려 오비토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넌 그렇게 인기도 많으면서 여자는 안 만나냐는 질문에, 나 오비토랑 사귀잖아―. 라고 무던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카카시를 아스마는 ‘아아, 그래.’ 따위의 수수한 반응으로 넘겨 버렸었다. 그 말에서 아무런 위화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 둘은 함께 다녔으니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카카시의 첫 커밍아웃이었다.

그렇게 대학생 시절부터는 자신에게 ‘카카시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여전히 별로 가까워질 일은 없는 녀석에게서 친히 전화가 온 것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카카시와 함께 셋이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거나 이야기하게 된 적은 지금까지 꽤 여러번 있었지만, 그야말로 딱 그것뿐인 관계였는데.


[뜬금 없겠지만…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부탁이라니?」

[카카시를… 부탁해. 곁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할 거야.]

「정말 뜬금없군. 갑자기 전화해서는 밑도 끝도 없이… 대체 무슨 일이야?」

[곧 알게 될거야.]

「하, 그런 식으로 말해 봤자… 그리고, 왜 하필 나한테?」

[카카시는 모르고 있지만… 난 전부터 네 마음을 알고 있었어, 아스마.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


오비토와의 짧은 통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하기만 했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한 것이었다. 아스마는 담배를 빼물고 필터를 짓씹으며 불을 붙였다. 할 수 있는만큼 독한 담배를 빨아내도 순식간에 차오른 화가 쉬이 내려가지 않았다. 뭘 안다는 거야. 네가 내 마음의 뭘 안다는 거야? 아스마는 탁자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인생 속 편하게 사는 놈의 철없는 투정으로 밖에 안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모든 게 다 정해져 있는 길을 걷는 따분함 또한 겪어보지 않는 이상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운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스마는 처음부터 카카시나 가이보다도 의욕이 없었다. 당연한 듯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가, 경영권을 이어받는 수순을 밟는 일은 따분함 그 자체였다. 억지로 끌어다 앉혀놓은 자리에서 아버지와 사춘기 소년처럼 반목하는 것도 지겨웠고, 틈만 나면 바깥으로 나돌 궁리로 머릿 속이 가득했다.

아스마는 당장이라도 울타리를 넘어 도망칠 고삐풀린 망아지 같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런 불상사 없이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학생일 땐 수업 빼먹고 이상한 책이나 읽어대긴 했어도 결코 학교 옥상을 벗어나진 않던― 학교 집 학교 집이란 모범생의 삶을 살던 녀석이, 이젠 회사 집 회사 집을 반복하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한 건지 허술한 건지 알기 힘든 성격에 머리는 좋고 성실해서 어디서든 곧 두각을 나타내는, 절친한 친구 녀석이 매일매일 눈 앞을 활보했기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일을 배우고 처리해 나가면서 실력을 인정받고, 누구에게나 곧잘 다정하게 웃는 모습을 하고 다니는 카카시를 지켜보는 것은 회사 생활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목적도 없이 타성에 젖어가는 숨막히는 상황을 잊게 해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다.

카카시는 회사에서 언제나 단정하고 차분하면서도 적당히 활기차 보였고, 친구로서의 모습도 한결같았다. 큰 고민이나 어려움도 없었다. 한마디로 그 때의 카카시는 이미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 잔잔하고 평화로운 수면 아래에는 오래 전부터 오비토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아스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아스마가 단 한번도 그 이상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가만히 바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친구로 남는 게 낫다고 자신을 타이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루가 다르게 감추고 견디기가 힘들어져만 갔다. 그래도 아스마는 참고 누르기를 반복했다. 카카시의 삶 한가운데에 불필요한 파문을 제 손으로 만들기는 싫었다. 거기에서 올 미안함을 생각하면 자신의 마음따위는 한낱 이기심에 불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카카시는 분명 평범한 친구였다. 하지만 친구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이성에게나 품는 감정을 갖게 된 자신이 낯설고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쯤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인가 외롭고 긴 싸움을 해온 아스마에게 오비토는 이제 단순한 친구의 친구가 아니라 연적이었다. 그런데 그 연적이란 놈이 전화해서 침울하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 카카시를 부탁한다니? 아스마가 살면서 겪은 것 중에 이보다 더 어처구니 없고 당황스러운 일은 없었다. 특히 자신이 품은 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는 투라니.

확실히 카카시 본인보다는 같은 입장에 있는 오비토쪽이 알아채는 건 더 쉬웠을지 모른다. 가끔이지만 같이 있게 될 때마다 불편함이나 경계심을 미처 다 숨기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것이 단지 친분없는 사람과 있어서 나오는 데면데면함이 아니라는 것을 오비토가 눈치챘다 해도 크게 놀랍진 않았다. 남자란 원래 그런 쪽의 감각은 날카롭게 발달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오비토의 언동에 불쾌감이 드는 것은 어쩔수 없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도대체 카카시를, 왜? 오비토는 다시 전화를 걸어봐도 응답이 없었고 얼마 뒤에는 번호가 아예 해지되어 있었다. 아스마는 혼란스러웠다. 일단 카카시라면 일을 많이 하고, 잘 하는 것을 넘어서서 거의 중독처럼 보인다는 것 말고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한동안은 회사자체도 너무 바쁜 시기였기 때문에 일 중독이란 것도 대수롭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다시 잘 생각해보면 유난히 지친 표정으로 멍해지거나, 넋을 빼놓은 듯 창밖에 시선을 두는 일이 많아진 것도 같긴 했다. 하지만 그게 오비토와의 통화 때문에 기분상 드는 생각인지 진짜 차이점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시 한번 주말이 찾아왔을 때, 아스마는 혼자서 고민만 깊어가고 있었다. 사실 방법은 카카시에게 묻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조차 재고 따질 부분이 너무 많았다. 있는 그대로 다 말을 해야할지, 자신에 관한 부분은 계속 숨겨야할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범위인지. 아스마 성격에는 맞지 않는 매우 조잡스럽고 난해한 문제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재떨이가 넘쳐 흐르도록 생각을 거듭하던 아스마가, 다음 번에 카카시를 만나면 ‘요즘 오비토랑은 잘 지내냐? 그렇게 일만 해서 얼굴 볼 시간이나 있어?’ 정도의 떠보기용 질문을 해보기로 결심한 순간. 가이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통이 모든 것을 무로 돌려 놓았다. 그때까지 하고 있었던 아스마의 고민과 번뇌는 전부 헛수고가 되었다.  


[아스마, 너 카카시 일 알고 있었어?]

「무슨 일?」

[카카시 녀석, 잠수 탔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뭐? 그 녀석이 왜? 알아듣게 얘길 해봐.」

[오비토가… 죽었댄다.]


이런 젠장. 아스마는 그제서야 뒷통수를 거세게 후려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도가 꽉 막혀 있다가 한순간에 뚫린 것처럼 거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거였어, 그 자식. 아스마는 잠시 한쪽으로 치워 두었던 담배를 다시 찾아 물었다. 친했든 안 친했든, 적이었든 동료였든 간에 알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은 기분을 싸하게 만들었다. 오비토의 그 발칙한 행동을 원망할 수 조차 없어졌다. 왜 그렇게 되어 버린건지, 그 전화의 진의가 대체 무엇인지 의문은 순식간에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역시, 카카시였다.

카카시는 승진이 내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평소에는 말 할 것도 없었지만 특히 근래 몇 달 동안의 실적은 가히 놀라웠던 데다가, 가장 최근에 중요한 계약건을 따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다소 파격적인 이 인사결정에는 포상격의 휴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회사로서도 급하고 중차대한 일들은 다 마무리가 되었고―그것도 최고의 결과로―, 한동안은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카카시는 인사이동만 받아들였을 뿐 그 휴가를 별 고민도 없이 거절해 버려서 주변 사람들을 경악케 했었다.

그게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다. 그런데 그 카카시가 느닷없이 자신이 거절했던 휴가를 다시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당장, 기한을 두배로 늘려서. 어차피 주려던 것이었고 본인이 바로 다른 사원들에게 인계되도록 업무정리까지 해버린 상태라 불허할 명목이 없었다. 가이가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회사로부터 카카시를 대신한 업무처리를 총괄해 달라는 연락을 받으면서였다. 일단 달라고 해서 줬지만 거의 한 달이나 쉬겠다니, 이러다 아예 그만둘 수도 있는 문제 아니냐며 인사과에서 안절부절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연락을 받은 직후에 가이는 카카시에게 전화했고 간단히 통화도 했다. 오비토에 관한 소식도 그때 전해 들은 것이었지만, 카카시는 그 뒤로 감감무소식인 상황이었다.


[오비토를 ‘찾으러’ 가야한다고 하더라니까. 꼭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넌 뭔가 들은 거 없어?]

「어이, 가이. 하는 김에 내 일도 좀 해라.」

[뭐라고?]

「아버지한텐 대충 둘러대 줘.」

[야, 아스마! 너 지금 그게 무슨…]


아스마는 가이의 목소리를 잘라내 버리고는 재킷과 담배를 챙겨 황급히 집 밖으로 나왔다. 손가락은 바쁘게 휴대폰에서 카카시의 번호를 찾아내고 있었다. 고장난 씨디처럼 전화가 걸리는 신호음만 귓가에서 반복될 뿐, 응답은 없었다.

아스마는 한없이 초조해졌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카카시가 어떤 상태일지 짐작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스마 자신에겐 ‘카카시가 죽는다면?’이란 질문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아아.

그 마음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



벌써 2년하고도 반년정도가 지난 일이다. 아스마는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깨닫고는 옛 생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익숙한 지하계단을 터벅터벅 밟아 내려간다. 그 일 이후로 카카시와 함께 자주 드나들고는 했었지만 최근엔 거의 와 본적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바 특유의 어둑한 조명과 가라앉은 공기 위로 귀에는 익숙하지만 제목조차 모르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여전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홀 안을 둘러보던 아스마를 향해, 꽤나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잡고 있던 가이가 손을 들어보였다. 언제봐도 쾌활한 표정인 가이 옆으로는 누군가가 정신을 잃은 듯 완전히 널브러져 있었다. 아스마는 앉자마자 담배에 불부터 붙였다. 그리고 희뿌연 첫 숨을 내쉬고 나서야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는 불청객에 대한 의문을 표시했다.


“아마 상관없을 거다. 저쪽에서 옮겨오는 중에도 꿈쩍도 안했어. 이 정도면 거의 기절 수준이라니까.”

“흐음….”

“아, 그렇지. 이 녀석, 카카시 대학 후배더라고.”


가이에게 대강의 상황설명을 전해들은 아스마는 텐조의 짧게 뻗친 갈색머리 위로 깊은 숨을 내뱉었다. 임원 면접때는 자신도 면접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기억이 난다. 출신학교를 보며 카카시를 떠올렸었으니 후배라는게 새로운 사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이상하게 착잡해지는 것은 역시 텐조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그저 가이 입에서 나오는 이름 석자에 반응해서 그런 것이겠지. 아스마는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아스마의 시선을 따라 가이도 텐조를 향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책임지고 데려가겠다고 큰소리를 쳐놨으니, 이대로 끝까지 일어나지 못하면 집에라도 데려가는 수 밖에 없었다. 사나이 마이트 가이, 청춘의 아픔을 겪고 있는 부하 직원에게 그 정도 쯤이야. 가이는 대단한 결심이라도 하듯 눈썹에 힘을 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마다 심심찮게 손님들이 들어차 있어 딱히 다른 곳에 둘 수도 없으니, 어차피 옆에 있을 바에야 차라리 완전히 뻗어버린 것이 지금 상황에는 오히려 나은 것이기도 했다. 아스마와 할 이야기가 그다지 들려줄 만한 것은 못될테니까.



.



그래서, 카카시가 뭐라고 했는데? 결혼… 축하한다고. 그게 끝? 응. 그 녀석답네. 한마디 소감을 내뱉고는 술잔을 들이키는 가이의 얼굴은 어느새 꽤 불콰해져 있었다. 아스마는 넘치기 시작한 재떨이에 꽁초를 우겨넣고는 한 개비를 새로 꺼냈다. 불도 붙이지 않으면서 이 끝으로는 필터를 잘근잘근 씹어댄다.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인상을 쓰고 있던 아스마는 눈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채 나지막히 말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야. 뭐가 문제인데? 카카시 입장에서는 그 정도가 최선이잖아. 내가 문제야, 내가. 뭔 소리야.


“화가 났어, 그 반응이.”

“응?”

“축하한다면서 웃는 게 화가 났다니까.”

“그게 왜?”

“하아… 그걸 모르겠으니 이러고 있잖냐.”


말을 마친 아스마는 라이터 끝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이미 다 갈라진 필터를 통해 잎을 태운 연기가 폣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각한 이야기같은 건 성미에 안맞는 가이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앞에 둔 듯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직이는 순간,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빼든 아스마가 먼저 말을 이었다.


“울었더라고.”

“카카시가?”


가이는 쉽게 믿기지 않아서 놀란 눈을 하고 되물었다. 카카시가 운다는 건 좀체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 제대로 본적이나 있었던가? 가이의 생각을 알겠다는 듯이 아스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카시가 돌아가고 나서 알게 된 일이었다. 묘하게 성질이 나는 것을 느끼며 다시 침대로 철퍽 쓰러졌다가, 카카시가 베고 있던 베갯잇이 조금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양도 적었고, 굳이 눈물이라고 생각할 근거가 충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걸 보니 다시 안심이 됐어.”


어딘지 모르게 불쾌했던 마음이 카카시가 남긴 감정의 흔적으로 다시 안도감을 되찾았다. 아스마는 그런 자신에게 굉장한 의구심이 들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감정이지?


“너 말야, 아직도 카카시 좋아하는 거 아니냐?”

“하, 이제와서? 그건 아니야.”


아스마는 냉정한 목소리로 딱 잘라 버렸다. 문제가 다시 미궁속으로 빠져버리자 가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거의 쥐어 뜯다시피 했다.

애당초 너희들 관계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지금에서야 이상하다고 느끼는게 더 이상한거 아니야? 그렇게 그만두고 카카시도 설득해 보라고 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결국 일년이나…. 어휴, 나는 친구로서 진짜 둘 다 행복하길 바란다만. 아스마 넌 나한테 상담하지, 카카시는 일언반구도 안하니 그쪽엔 모른척 해야하지… 나도 중간에서 정말 곤란하다고. 이런 건 내가 생각하는 청춘이 아니야! 내가 말하는 청춘은 좀 더…

흠뻑 불콰한 얼굴로 떠들기 시작한 청춘담론은 이미 수백번도 더 들은 것이기에 아스마는 조용히 자기생각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가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정상범위에서 벗어나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의 내리려고 시도한 적조차 없다는 것이 맞다. 카카시는 자신에게 고백한 날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어떤 것도 내색하지 않았고, 몸만 섞으면서도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애매한 상황에 대해 정리하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일을 남색이나 즐기며 계속해서 미뤄둘 수 있었던 거였다. 자신이 결혼을 하게 되면서 암묵적으로 이 관계가 끝나버린 지금까지. 그런데 정작 끝나고 나니 그동안 쌓아왔던 것들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한여름에 온 몸에 눅진한 땀이 베었는데도 씻어낼 수 없는 것처럼 아주 찝찝하고 불유쾌한 느낌으로.

적어도 한가지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다.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예전의 자신이 느끼던 감정같은 건 이제 없고, 했던 행동들도 지금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렇게 카카시를 찾아 덩달아 회사를 이탈해 버렸을 때, 그로 인해 아버지와의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았는데도 모른척 했을 때, 결국 쓰러지셨다는 소식에도 끝내 돌아오지 않고 카카시를 찾는 쪽을 선택했을 때….

카카시에 대한 마음은 그때 이미 다 쏟아버린 것 아닐까.

아스마는 간혹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상당히 가혹한 것이었다. 항상 강인한 모습이었던, 그게 지나쳐 자신을 숨 막히게만 한다고 느꼈던 아버지가 나약하게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아스마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네 탓이 아니라며 웃던 얼굴 어디에도, 그렇게나 싸워댔던 극엄한 아버지의 모습은 서려있지 않았다. 그것이 아스마를 더욱 회한의 수렁으로 몰아 넣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제라도 뜻을 이어받겠다는 결심은 의외로 쉬웠다. 그 간의 방황이, 가족이 평생동안 일궈 놓은 곳이 소중하지 않아서는 아니었으니까. 아버지가 바라던 삶―회사를 경영하고 적당한 시기에 결혼하는―을 살기로 마음먹은 그때부터, 아스마에게 ‘카카시’란 선택지는 영원히 사라졌다.

아스마는 담배를 비벼끄고 술잔을 들이켰다. 식도를 훑고가는 액체가 뜨거워 머리 끝까지 열이 오르는 느낌이다. 카카시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거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아니면 오히려 온전해 보이는 것이 어딘지 괘씸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모르겠다.

청춘 레파토리가 끝이 났는지 가이는 다시 한번 술을 들이켰다. 그래도 그 전까진 어찌어찌 가능했는데 말야, 너네가 자기 시작한 후로는 아무래도 우리 셋이 모이는 것도 어렵게 돼 버렸잖아. 하, 정말 어쩌다가…. 아스마는 가이가 중얼거리는 말을 술잔에 주워담아 삼켰다. 목넘김이 매우 쓰다. 그래, 나도 묻고 싶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 버린 걸까.

아스마는 탁 소리가 나도록 술잔을 내려 놓았다. 명쾌하게 정리할 수도 없는 상황이면서 찝찝하기까지 해서, 그냥 모든 걸 없던 일로 돌리고 싶어질 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상태로 근 1년을 지내온 건지. 둘 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던 거야. 아스마는 이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이야기하는 것조차 지쳐가던 차에 아스마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만 먼저 일어날게. 오늘 고마웠다.”

“응? 술 남았는데?”

“쿠레나이가 마중왔어.”

“아, 그래. 그럼 어서 가봐.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네.”

“새삼스레 별 소릴.”


어차피 해결책을 찾거나 답을 내기 위해 만나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가이는 카카시와 오비토의 사이를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중 하나이기도 했고, 아스마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카카시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이마저 없었다면 버티기나 했을는지.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기에 아스마는 가이에게 항상 고마움을 갖고 있었다.


“그럼 회사에서 보자고, 사장님.”


아스마는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담배를 챙겨 넣고는 손짓으로 가이의 인사에 화답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가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쨌든 여태 해왔던 것처럼 지내진 못할테니, 일단락 된건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입맛이 씁쓸해져 왔지만 남은 술을 비울 마음도 별로 들지 않았다.


“하아, 나도 가야겠다. 일단 텐조씨를 깨워야 하나….”


이야기 중간중간에 확인해도 텐조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낼 뿐 계속 미동도 없었기에, 가이는 잠정적으로는 집으로 데려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번 깨워보기나 할 요량으로 옆에서 꿈쩍도 않고 뻗어 있는 텐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맙소사.”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테이블 위로 머리를 둘러안고 있던 텐조의 팔이, 정확히는 하얗게 질리도록 쥐고 있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봐도 좀 전까지 자고 있던 모양새와는 달랐고, 엄청난 위화감마저 들었다. 당혹스러움에 섣불리 말을 잇지 못하는 가이에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To be continued




 

2012. 5. 3.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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