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포스팅은 원래 카카시 생일 기념으로 2012년 9월 16일, 08시 03분 에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사즈미네님께서 이 소설을 만화로 그려 회지를 내게 되어 스포 방지를 위해 한동안 비공개였고, 원나블 온리전 행사가 끝난 후 현 날짜로 갱신하여 공개함을 밝힙니다. (2013.03.11.)
아래부턴 원 포스팅입니다.
1. 커플링(?)은 읽다 보시면.........^^;
2. 주말근무-_- 압박을 뚫고 카카시 생일 지나기 전 올리려고 했는데... 뜬금없이 인터넷이 말썽. 그래서 실패. 이 밤의 끝을 잡고 마음대로 생일을 연장하고 있네요.......ㅋ 뭔가 더 하고 싶은 마음에 계획에 없던 걸 급하게 써서.... 글이 많이 허접.... 죄송해요... 또르르........
3. 설정상으로 정말 뜬금없는 소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앞으로는 쓸 수가 없을 이야기라, 생일이란 특수성을 빌려씀..ㅋ 현재까지 나온 단행본(59권) 기준 설정. 네타 생각하심 안돼요. 망할노무 원작.. 또르르.......
4. 시기적으로도 정말 이상한 소설. 하지만 정작 그 시기엔 바빠서 못쓸 게 뻔하고, 3번의 이유로 시간 보내봤자 좋을게 없음.ㅋ 아 뭐 언제든 어때요, 쓰고 싶음 쓰는거지. 하.
5. 3번, 4번의 압박을 이겨내고도 굳이 쓴 이유는..... 현재 인생최대 멘붕파티가 열린 카카시를 위로해주고 싶었어요............^.T 생일이니까. 생일만이라도 좀 마음 편해지라고......... ^.T (라기에는 앞 소설이 참 민망해지네요. 저는 육체적인.. 것도 그렇지만 카카시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걸 더 즐기는 듯......-_-;;) 생일 핑계라도 없으면 못 쓸 이야기.... 지금이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ㅋ 부제는 그런 의미에서의 '마지막' 입니다.. 이번 카카시 '생일기념'으로 한 짓 중 마지막이기도 하고요.. 결국 자기만족이구만...........?!
6. 음악이 나옵니다. 깜놀 주의.
7.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카시총수] 여름 끝에서 부제: 마지막 선물 written by pathos.
한 여름의 기세를 잃어버린, 서쪽으로 기운 태양빛이 온 마을에 길게 누워있었다. 조금 더운가- 싶다가도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해 가을이 바짝 다가왔음을 완연히 느낄 수 있는 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여름은 아직 세상을 떠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을 잡아 당기듯 빛과 온기가 발꿈치에 진득하게 묻었다 겨우 떨어져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길게 늘어진 태양은 저녁기운에 섞여 특유의 나른함을 만들어냈다. 시간도 느릿하게 걸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나른함을.
카카시는 책을 보며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늦여름. 늦은 오후. 몽롱한 황금빛으로 물든 마을은 묘하게 들떠 있었다. 그 조금은 상반되는 분위기에 책 속에 몰두해 있던 카카시는 고개를 들었다. 저마다 각자의 생각과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걷는 사람들. 그 사이에 평소와 확연히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띄었다.
‘아… 오늘이 할로윈이었나. 이거 귀찮아지겠는데. 어서 눈에 안띄는 곳으로…’
한가하게 돌아다니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카카시가 조용히 숨어 있을만한 곳으로 방향을 바꾸려 할 때였다.
“찾았다! 여기 있었네요, 카카시 선생님!”
이런, 늦었군. 속으로 한숨을 내쉰 카카시는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뒤돌아 보았다. 정면에서 비추는 노란 햇빛 속에서 사쿠라가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니까요-’ 라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끝이 헤진 넓고 검은 창이 달린 고깔모양의 모자에 망토를 두른 채. 이제는 많이 자라버려서, 웬만한 수로는 따돌릴 수도 없게 되어버린 제자는 화장 탓인지 새삼스럽게 여자가 되어가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게 했다.
사쿠라는 곧 바로 이런 날 책이나 읽으며 처박혀 있으면 안 된다고, 귀찮더라도 선생님도 좀 즐기려고 노력이라도 해보라며 잔소리를 쏟아냈다. 물론 카카시는 이미 사쿠라의 단단한 악력에 손목이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카카시는 이런 상황이 되면 골치 아프게 머리를 써 빠져나가기 보다는, 포기라는 선택지를 고르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한참을 목소리를 높이던 사쿠라의 결론은 ‘제가 끝내주는 작품을 만들어 드릴게요. 분장은 저에게 맡기세요.’ 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학생들은 다 빠져 나가고 없는 아카데미의 빈 교실. 이미 한바탕 작업이 이루어진 후인지 온갖 도구들과 옷가지들이 널려있었다. 아직 해도 다 지지 않았는데. 다들 이런 것에는 정말 부지런하군. 카카시는 멍하게 사쿠라가 하는대로 끌려가 의자에 앉으면서 생각했다.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카카시를 위아래로 훑어내리던 사쿠라는, 역시 선생님은 뱀파이어가 좋겠어요, 라고 혼자 결론을 내리더니 주섬주섬 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선택권조차 없군.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카카시는 잠시 사쿠라가 바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분장하는 동안 책을 보는 게 가능할까- 따위의 생각을 이어갔다.
“헤헤, 실례 좀 할게요.”
“아—?”
이번에도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은 사쿠라는 코 끝부터 카카시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복면을 스윽 벗겨냈다. 그 뒤 이어진 요구에 따라 카카시는 서클렛도 풀어내었다. 하- 도대체 이런 얼굴을 왜 그렇게 가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던 사쿠라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푸른끼가 보일 정도로 새하얀 파우더를 얼굴 전체에 도포하고, 눈썹을 그린 뒤 브러쉬로 정성스럽게 정돈하고. 꽤나 익숙해보이는 손길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원래 피부가 하얘서 너무 잘 어울린다, 인상이 강해보여야 하니 눈은 역시 스모키하게 가는 게 좋겠다, 등등 사쿠라는 새처럼 재잘거렸다. 굳이 다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카카시는 간단한 감탄사같은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쩌다 습관처럼 웃어버리면 사쿠라가 화장 망친다며 타박을 주었다. 사쿠라는 어느새 ‘선생님도 할로윈답게 보내도록 분장을 해드린다.’ 라는 본래의 목적보다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찾았다’라는 이유로 더 즐거워 보였다.
눈화장은 꽤나 세심한 작업을 요하는 것인지 떠드는 것도 멈추고 집중하던 사쿠라가 이윽고 됐다, 하며 뿌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는 전체적으로 리터치를 하며 명암을 만들어내고, 입술은 붉게 물들이고, 입술 한쪽으로는 피가 흘러있는 효과도 넣고, 머리를 정리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사쿠라는 이 과정 내내 뭐가 그리 신나는지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Halloween 축제날이야 새해를 맞는 날이야 먼 옛날 어느 부족들은 여름의 끝인 10월의 끝이 한해 끝이었대
“아까부터 흥얼거리는 그건 무슨 노래니.”
간혹 사쿠라가 하는 요구를 들어주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카시는 문득 드는 호기심에 물었다. 그냥 할로윈 노래예요. 그러고보니 제목도 모르네. 하지만 할로윈만 되면 여기저기서 많이 불러요. 한번도 못 들어 보셨어요? 카카시는 할로윈 자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노래를 주의 깊게 들어 본 적 또한 없었다. 글쎄- 힘없는 목소리로 흘리듯 대답하자 사쿠라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마무리 작업에 몰두하면서 지금이라도 실컷 들으라는 듯 다시 노랫말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
사쿠라는 분장을 다 마쳤을 때쯤 찾아온 이노와 함께 자리를 떴다. 이노는 미처 카카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먼저 눈에 띈 사쿠라에게 다들 분장을 마치고 호카게 관저로 가기 위해 모여있다고, 너만 오면 되는데 뭐하고 있느냐며, 너도 지각대장인 너네 선생님 닮아가냐고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카카시가 지각대장이라 미안하구나, 하며 웃자 이노는 비명까지 지르며 까무러치듯이 놀랐더랬다. 카카시 본인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카카시가 파리하고 창백한 피부에 피까지 흘리고 있는 ‘뱀파이어 카카시’였다는 점이 이노에겐 더 큰 충격요인이 된 듯 했다. 그러다가 방금 전까지 카카시를 흉봤다는 사실은 싸그리 잊어버렸는지 너무 잘 어울리고 멋있다며, 남자 닌자들의 평균미모 상승을 위해서 복면은 앞으로 영원히 넣어두라고 호들갑을 떨던 이노였다. 카카시는 왁자지껄 요란스러운 아이들의 행동에 한번 더 살풋 웃어버리고 말았다.
바깥은 느른하게 내려앉아 있던 햇빛이 거의 다 걷히고 어느새 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래도 선선한 바람 속에 아직 태양이 두고 간 열기가 따뜻함으로 남아있는 채였다. 다시 거리로 나온 카카시는 자신의 모습에 아직도 어색함이 가시지 않았다. 다른 분장에 비하면 원래의 얼굴에서 거의 변화가 없는 수준이었지만 난생 처음해본 할로윈 복장은 생소했다. 복면도 하지 않은데다가 검고 무거운 망토까지 두른 옷차림도 적응이 쉽지 않은 상태였다. 마을 곳곳에는 카카시처럼 할로윈 분장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누가 누군지 전혀 구분이 안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런 날 어디 숨어 있는 건지 보이지도 않던 카카시가 제대로 분장까지 하고 돌아다니자, 신기해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웬일이냐며 아는 척 해오는 사람들조차 한참을 들여다 봐야 아- 누구, 할 정도로 모두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심하게 일그러진 상처를 흉내내거나 하도 기괴한 모습이어서, 얼결에 인사를 나누고도 끝끝내 누군지 아리송한 채로 지나친 사람도 두어명 되었다. 서로 모르는데 착각해서 말을 섞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할로윈 축제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은 아예 일부러 목소리까지 변조해서 더욱 헷갈리도록 장난을 치기도 했다.
카카시는 낯선 곳에 온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배경은 나고 자란 나뭇잎 마을 그대론데,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죄다 바뀌어버린 것 같아 기묘한 고립감마저 들었다. 카카시는 자연스럽게 한적하고 익숙한 장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소음이 점점 멀어졌다.
사륜안에 흉터까지 있어서 별다른 분장을 안해도 되겠어요. 게다가 사륜안은 붉은색이라 입술하고도 너무 잘 어울려요! 분장을 마치고 전체적으로 훑어보던 사쿠라가 한 말 때문에 더욱 생각이 나는지도 몰랐다. 네가 살아 있었다면 아이들보다 더 즐거워하며 오늘을 보냈겠지…. 점점 어둑해지는 저녁공기의 내음을 맡으며 카카시는 생각했다. 위령비에 가까워져 갈수록 공기에 섞인 풀냄새가 짙어졌다.
.
“어쩌다 보니 오늘은 이런 모습이네….”
카카시는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비석에 새겨진 이름이 대답을 해줄리도 없건만 카카시는 가만히 그 곳을 응시했다. 이런 날, 제자가 이렇게 신경써서 분장까지 해줬는데도 결국 이 곳에 와서 후회만 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그 후에라도 제대로 지켜낸 게 있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목숨을 대신할만한 자격같은 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 곳에서도 많이 원망하고 있겠지? 네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내게 뭐라 말했을까….
“또 여기냐? 오늘같은 날.”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카카시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들자 기척도 없이 나타난 말 소리의 주인공이 어느새 바로 옆으로 나란히 서 있어서 카카시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아-? 으응….”
정확히 누구인지 떠오르진 않았지만, 분명히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목소리여서 카카시는 얼결에 대답했다. 카카시처럼 어깨부터 무릎 아래까지 검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머리엔 Jack’O 랜턴에 쓰이는 호박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남자는 앞으로 더 나아가더니 카카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위령비 위에 털썩 걸터 앉았다.
“너무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프네.”
카카시는 능청스럽게 말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스름이 시시각각 짙게 깔리고 있어 시야가 아까보다 훨씬 어두워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기괴하게 웃는 모양으로 구멍이 난 호박 속은, 깊은 심연같아 보일 뿐 얼굴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카시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까 말을 걸어오던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익숙하고 편안한 목소리가 아는 사람임엔 분명하니, 누구에게나 할 수 있을만한 말정도로 이야기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호박 속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을 포기한 카카시는 남자가 박자라도 맞추듯 흔들어대고 있는 다리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우치하 오비토. 가볍게 흔들거리고 있는 양 다리 사이로, 그리운 옛 친구의 이름이 보였다.
“야, 카카시. 그런데 여기는 이제 그만 와도 되지 않아? 축제 날까지…. 네 친구도 이런 걸 바라진 않을 걸.”
일상적인 인사정도만 나누려고 했던 카카시는 대뜸 던지는 남자의 말에 당황했다. 누구인지 기억조차 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 있다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남과 이야기하기에는 결코 달갑지 않은 화제가 더 문제였다. 얼굴을 가린 틈을 타서 그동안 쌓아둔 불만이라도 터뜨리는 건지…. 당혹감에 가만히 고개를 들자, 검고 깊게 뻥 뚫려버린 동굴같은 표정이 카카시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카카시도 이런 생활이 상당히 어리석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카카시 또한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위령비’ 앞에선 그 무엇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해주지 않으니까.
“과연 그럴까…. 차라리 물어볼 수나 있었으면 좋겠군. 본인이 없는 이상 그런 생각은 비겁한 자기위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카카시는 다시 이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작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시할 수도 있을만한 참견이었지만 대답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적대감이나 반발심을 내비친 건 아니었다. 카카시는 눈 앞의 남자가 무례하다고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다시 옛 기억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순간으로.
“에휴—, 카카시 너답다.”
남자가 크게 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카카시는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이 말이 아니었으면 아마 남자와 이야기하는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회상에 한참동안 잠겨 있었을 것이다. 카카시가 고개를 들자, 호박의 찢어진 입이 웃고 있었다. 웃는 표정이지만 사실 무기질에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더욱 괴기해 보였다. 카카시는 새삼 나중에라도 꼭 누구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할 수 없지. 그럼 난 먼저 가 봐야겠다.”
카카시가 자신의 모습에서 받는 느낌같은 건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앉을 때만큼이나 경쾌한 몸짓으로 위령비에서 내려왔다.
“…그래.”
남자가 굉장히 변덕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카카시는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예상 못한 불청객과의 불편한 대화에 슬슬 먼저 자리를 피하고 싶어지던 차였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떠나준다면 위령비에 좀 더 머물 수 있었다. 남자는 올 때처럼 카카시 옆을 지나쳐 갔다. 카카시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남자가 비켜줌에 따라 다시 훤히 이름을 드러낸 위령비에 다시금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그 때, 카카시의 등 뒤로 몇 걸음 걸어가던 남자가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그 친구라면 분명, 널 원망하지는 않을 거야. 네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네 자신만큼이나 잘 알테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지금까지 네 눈이 되어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뭐?
그 말을 아는 건…. 카카시는 갑자기 등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놀란 마음에 급히 뒤돌아 보았지만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것처럼, 유난히 어둡고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카카시는 한동안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연한 정적만이 흐르던 어느 순간. 멀리서부터 솨아아-하는 소리를 내며 숲을 통과해온 바람이 카카시를 스쳐지나갈 때쯤,
아아—.
카카시의 붉은 눈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조용히 흘러 떨어졌다.
모든 감각이 텅 비어버린 채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는 카카시에게, 이상하게도 사쿠라가 흥얼거리던 노래가 맴돌았다. 그것은 늦여름의 햇빛처럼 몽롱하게 부유하며 카카시의 머릿속을 떠날 줄을 몰랐다.
오늘은 잠든 영혼들도 나와 사람들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날 살아있는 게 다 반가워 지는 날 여름이 끝난 날 겨울이 물든 날 사랑이 가고 오는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