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을 너무 오래해서 기억이 안 나실 것 같아서 7편을 링크합니다. 끄응..
http://delusionalworld.tistory.com/352
뭐, 대충 요약해 드리면.. 저의 억지로 우연과 우연과 우연이 엄청나게 겹쳐서ㅡㅡ; 바에 갔던 텐조가 가이와 아스마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자신이 카카시나 카카시와 아스마의 관계에 대해 짐작만 하던 것에 확신을 갖게 된 것도 모자라, 짐작보다 더 최악이라서 완전 빡쳤다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텐조는 취해서 뻗어있어야 하는 거였지만,
소설은 여기.
엇갈림 - #8.
텐조는 찬물로 몇 번이고 얼굴을 씻어냈다. 머리끝까지 올라 내려갈 것 같지 않던 술기운과 화기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평소 주량보다 몇 배는 되는 술을 마셨는데도 너무도 또렷하게 정신이 되돌아와 있었다. 가이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변명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말을 더듬으며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일단 카카시에 관한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으니 진정하라고 이야기 한 후, 어색한 침묵을 벗어나 생각도 정리할 겸 화장실로 온 것이었다.
진정할 필요가 있는 건 텐조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중간 아스마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것을 몇 번이나 참고 있었는지 모른다. 아스마가 나간 직후에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어졌고, 그대로 아스마를 쫓아 나가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짓이겨지도록 물고 있어야 했다.
얼굴을 훑어내는 동안 미적지근해진 물방울들이 텐조의 앞 머리카락과 턱 끝에서 톡톡 떨어져 내렸다. 물기가 속을 어지럽히던 열기를 가져가 버리자, 하루 종일 시끄러운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스피커가 나가버린 것처럼 모든 감각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꽤 맑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머리에 남아있는 알콜의 기운과 귀 안에서 울리는 약간의 이명. 그렇게 잠시 멍하게 거울을 바라보던 텐조에게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은 카카시였다.
얼마 전 자신의 품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울음을 쏟아내던 모습. 누군가에게 잘 기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더욱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들…. 텐조는 저도 모르게 세면대 위에 얹힌 손을 꾸욱 쥐었다.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다시 파장을 일으키며 올라오려 했다. 텐조는 심호흡을 하며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지금의 상황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텐조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생각도 같이 정리했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진실을 듣는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기가 막힌 나머지 저도 모르게 허, 하는 탄성을 내지를 뻔 했으니까. 그러니 가이가 그렇게나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가이를 위해서라도 끝까지 못 들은 척 숨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겠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가이가 걱정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할 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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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다. 현실로 실현될 가능성 따위는 상관없이, 이미 머릿속에서는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스마는 결혼할 여자를 두고도 회사 직원과―그것도 남자에 소꿉친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아는 ‘카카시’와― 놀아났다는 희대의 추문을 달고 다니며 파경을 맞았고, 카카시는 여느 내연의 인물이 그렇듯이 여우같고 영악한 이미지를 얻어 쿠레나이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는데도 먼저 꼬리를 쳤다는 둥, 좋아하는데 이어질 수는 없으니 방해라도 하려고 작정을 한 것 아니냐는 식의 온갖 추측과 악의적으로 과장, 재생산되는 루머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기엔 게이에 대한 갖가지 편견과 조롱이 보너스처럼 추가되었다. 아니면 평소 이미지에 도움을 받아, 아스마가 망나니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은밀하게 카카시에게 쏟아붓고 있다가 결혼할 때가 되니 손 씻고 입 닦고 모른 척 해버린 것이 되고, 카카시는 실컷 몸과 마음만 농락당하다 버려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 동정여론이 형성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텐조가 카카시와 훨씬 가까우니, 카카시에게 조금의 호의라도 남아 있다면 후자 쪽으로 소문이 퍼지게 될 가능성이 더 높… 아니, 아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가이는 으아아, 작은 비명소리를 내며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런 것보다는 카카시와 가까운 선후배 사이였다는 텐조에게 이런 식으로 아웃팅을 해버렸다는 것이 우선적인 문제였다. 텐조도 개인적으로 고민이 있는 것 같고 카카시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멀쩡했던 선후배 사이마저 뒤틀어 놓다니. 아, 마이트 가이 이 멍청한 놈. 어쩌자고 이런 경솔한 짓을!
‘짐작하고 있던 일’이라는 텐조의 말을 떠올리며 가이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그 말은 무작정 숨기거나 덮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의미함을 받아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술이 가이가 냉정을 찾는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가능한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이야기를 마무리 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힘을 준 손으로 탁,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그 앞으로 텐조가 돌아와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조금 전까지 아스마가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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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잘 된 일이에요. 저도 확인하고 싶었던 부분이니까.”
“그,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럼 카카시랑은….”
“지금까지와 변함없을 겁니다. 제가 알고 있다는 것을 선배한테 알리게 되더라도… 선배 입장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테니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하아….”
자신이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에 비해 텐조가 막힘없이, 그것도 최선의 내용만으로 답하자 가이는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표정을 역력하게 내비쳤다. 하지만 가장 걱정했던 부분만을 무사히 넘겼을 뿐,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가이는 한결 편안해진 움직임으로 빈 술잔에 남은 술을 따라내며 이 다음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텐조가 모른 척 해주었으면 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다 들었으니 알겠지만…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아마 많이 힘들어 하고 있을 거야. 누구한테 기대는 성격도 아니니….”
가이는 며칠 전 회사에서 카카시와 잠시 담소를 나누던 때를 떠올렸다. 알고 보니 자기가 잘 아는 대학 후배더라며 텐조 이야기를 하던 바로 그 때였다. 시기적으로 아스마와의 일이 있고 난 후였는데도 가이는 카카시에게서 아무런 낌새도 눈치 채지 못했었다. 자신이 둔한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카카시는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했다. 그러면서 속은 대체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지. 섣불리 아는 체 하며 도와줄 수는 없어도 더 큰 혼란이나 상처를 주는 것만은 막아주고 싶다. 그러니 텐조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그래서 말인데, 오늘 아스마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모른 척 해달라는 겁니까?”
“…부탁하마.”
텐조는 조용히 분노했다. 아스마가 뻔뻔스럽게 내뱉던 말들이 다시금 떠올라서였다.
“선배는 아스마씨가 좋아했었다는 것도 모르는 건가요.”
“그래.”
“…….”
그리고 그것마저 입을 다물어 달라는 거군요. 선배는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는데. 텐조는 떠오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스마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 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본인이 직접 지금은 아니라고 단정 짓는 이상 일부러 알릴 이유는 없다. 어차피 양쪽 다 이 이상 관계를 이어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간 감정 따위 뒤늦게 알아봤자 위로조차 되지 않을 테니까. 설사 지금도 마음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텐조에게는 동정해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도 좋아하는 거라면… 아니 하다못해 선배가 어떤 마음일지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결혼 소식에 감정의 동요를 보인 것이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는 그런 이기적인 말 따위는 절대 못 했겠지. 화를 조용히 가라앉히기 위해 텐조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마 많이 힘들어 하고 있을 거라 하셨죠.”
“…그랬지.”
“전 대학 다니면서 선배가 눈물 흘리는 모습 같은 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그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두 분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은데… 맞나요.”
“…으응, 거의 그렇지…. 그런데 그런 건 왜….”
“많이 힘든 정도가 아니라,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
“기력이 다 빠질 만큼 울기도 하는 사람이더군요, 카카시 선배는….”
“…….”
“그 모습을 보게 된 건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우연 때문이었지만….”
텐조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탁자 위라면 어디든 좋았을 그 시선은 하필 아스마가 남기고 간 재떨이 위에 머물렀다. 왜, 하필. 이런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선배는.
가이는 한동안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텐조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텐조에게서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텐조의 표정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이제야 가이에게 몇 가지 의문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이는 아스마와 나눈 이야기를 텐조가 들었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텐조의 반응이 왜 단순히 놀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는 것인지, 텐조가 왜 침묵을 지키며 자는 연기를 하고 있었는지, 헌데 어째서 끝까지 모른 척 하지 않고 이제 와서 자신이 듣고 있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인지… 같은 생각은 가질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의구심이 드는 것이었다. 절친하게 지냈던 선배에 대해서 우연히 알게 된 일이라면, 경악이든 실망이든 분노든 카카시를 향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카카시에 대한 것은 예상하던 일이었다며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녀석이, 대체 무엇에 이렇게 심각해 하고 화까지 내는 것인가.
“저기…, 자네 지금…”
“선배한테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건, 선배 자신에게도 그렇지만… 저한테도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결례를 범하며 들어선 안 될 이야기를 들었으니…, 말씀 드리는 겁니다.”
끄응, 가이는 저도 모르게 이도저도 아닌 앓는 소리를 냈다. 많은 정보들이 들어오고 있기는 한데 전혀 인식이 안 되는 상태였다. 텐조의 말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이 너무 생각도 못했던 것이라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늦었다. 그 사이 텐조는 떠날 채비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여러 가지로 감사했고 죄송했습니다. 정말 실례가 많았네요.”
“응? 어어…. 괜찮아.”
“그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그, 그래.”
자리를 벗어나는 텐조를 보며 가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얼결에 대답했다. 그렇게 몇 걸음 멀어져가는 텐조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텐조가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걸어온다. 가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말도 아니었다. 텐조가 떠나고 한참 뒤에야 가이는, 그것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에 더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카시 선배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제가 옆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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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씨, 어제 말한 제품 개요 다 짰어요?”
“아! 대리님 그게 아직… 개발부에서 보충자료가 안 와서요….”
“스즈키씨! 내가 오늘까지 달라고 했으면 그런 거야 스즈키씨가 개발부를 삶아먹든 볶아먹든 얻어 냈어야지,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요?”
“죄송합니다….”
“개발부 담당자 누구예요? 지금 나한테 당장 전화 돌려요.”
“네….”
“사야카 대리, 그럼 전략 기획서는?”
“아, 다나카 과장님… 들으셨어요? 하아. 빠듯하겠지만 마감은 맞춰볼 게요….”
마케팅 부서에서 짐을 챙겨 오느라 출근시간 이후로 약 30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첫발을 들인 해외무역 부서는 들었던 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월요일 아침 특유의 우울함은 찾아올 틈도 없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쫓기듯 자판을 두들기거나 신경 날카로운 대화들이 오고가는 소리만 들렸다. 더불어, 잠시 입구에 멀뚱히 서 있는 텐조에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과장님, 근데 이 회사는 국내에도 들어와 있는 기업 아니에요? 이게 왜 해외무역부 담당이야? 마케팅부는 뭐하고!”
“뭐, 들어 온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마 관례상 계속 맡아야 할 걸.”
“헉, 부장님…. 귀도 밝으셔라. 아하하….”
사야카 대리의 말에 대답한 것은 과장 쪽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였다. 텐조는 사무실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야카 대리 쪽을 향해 있던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문득 다른 시선을 눈치 챘다는 듯 움직였다.
“아. 왔구나, 텐조.”
카카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네자, 사무실 안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텐조에게로 쏠렸다. 무관심도 그렇지만 한 순간에 자신에게로 시선이 집중된 것 또한 당혹스러워 텐조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카시가 직접 직원들에게 텐조를 소개했다.
“이쪽은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텐조 대리. 다들 인사해.”
모두 간단히 통성명을 하고 나니 곧바로 사야카 대리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아침부터 일에 치이던 사람들도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분위기가 환기되고 들뜬 것이 싫지 않아 호기심 어린 눈빛들을 하고는 무언으로 사야카 대리의 질문에 동참했다.
“부장님 좀 전에 엄청 다정하게 이름 부르시던데,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예요?”
“아아. 사실 대학후배거든. 아직까지 이름 부르던 버릇이 남아 있는데… 그러고 보니 이제 고쳐야겠네.”
“오호라- 그럼, 텐조 대리님을 캐보면 부장님의 대학시절 과거가 줄줄이 나온다 이거군요? 회사에서야 완전 신사시지만 의외로 학생 때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후후.”
“맞아요, 완전 여자도 꽤나 울려봤을 것 같고.”
일할 땐 혼내고 시무룩해지고 하다가도 이런 건 죽이 잘 맞는지 스즈키가 거들었다. 두 여자는 서로 마주보며 짓궂게 키득거렸고 나머지 사람들도 내색은 안 해도 카카시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텐조는 처음엔 자신을 캐낸다는 말에 당황했다가, 다음으론 기억에는 있지도 않은 ‘대학생 카카시가 여자를 울리는’ 상상을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떨쳐내고 있었다.
“글쎄, 내 과거는 그렇게 쉽게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 말이지. 게다가 이 친구, 입 엄청 무거워.”
그렇지? 카카시가 텐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어깨에 팔을 두르며 확인하듯 반문했다.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손발 좀 맞춰달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어차피 직원들에게도 다 보이는 장난 섞인 제스처였지만 텐조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어깨가 데일 듯이 뜨거워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모두가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대답만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텐조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네, 넷! 물론입니다!”
과하다 싶게 기합이 들어간 대답에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텐조는 뭔가 실수했나 싶어 얼른 사무실 안을 한번 둘러보고 다시 카카시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크게 내는 목소리에 조금 놀라 눈이 동그래졌던 카카시가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봤지? 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하아…. 군기가 바짝 드신 걸 보니 부장님께서 벌써 완벽하게 관리를 해 두셨나 봐요.”
“누가 아니래. 이러니까 더 의심스러워진단 말이지….”
이젠 자못 진지해져가는 두 여자의 정신 나간 농담을 타키 과장이 적당히 끊었다.
“흠, 어쨌든 새 얼굴이 생겼으니 이건 곧 회식을 해야 하는…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네요, 부장님.”
모두 지당한 말씀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카카시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카시는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가볍게 한숨을 냈다.
“뭐, 조만간 날 잡지. 내가 안 한다고 해도 따로 모여서라도 기어코 할 테니까, 차라리 옆에 붙어서 이 친구 입단속이라도 해야지.”
카카시의 농담에 여기저기서 웃는 소리와 함께 회식 소식을 기뻐하는 낮은 환호성이 들렸다. 오가는 대화를 정신없이 듣고만 있던 텐조는 문득 자신이 아직도 짐을 들고 서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카카시도 더 이상 세워둘 생각이 없다는 듯 텐조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자리는 저쪽이야, 희미한 미소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텐조는 카카시가 안내한 자리에 짐을 내려놓았다.
남은 오전시간은 자리정리와 인수인계 작업을 하는 데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텐조와 부서를 맞바꾼 전임자가 정리를 잘 해두고 간데다가 한 회사 내에 있으니 필요하면 바로 사내 메신져나 전화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다른 부서원들도 바쁜 와중에도 꼼꼼히 배려해 주어서 인계 작업이 어렵지는 않았다.
점심시간엔 사내식당에서 부서원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마케팅부서는 가이의 성격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과도한 기합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곳은 밝고 활달한 건 비슷하지만 훨씬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카카시는 점심시간 직전에 어느 샌가 사라져 보이지 않더니,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돌아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카카시의 자리는 모두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위치와 각도로 되어 있어서, 조금 거리는 있었지만 텐조도 고개만 돌리면 카카시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까만 테의 안경을 쓰고 일에 집중하는 모습, 누군가 말을 걸 때마다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이나 각 프로젝트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하는 모습들에 텐조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자신이 얼마 전 봤던 모습이 정말 한낱 꿈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안경을 쓰는 건 대학 때도 종종 보던 일이라 더 익숙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것이야 말로 텐조가 지금까지 그리고 좇아왔던 카카시의 모습이었다.
작은 것들로도 이렇게 충분히 기분 좋고 행복한데. 이게 한 순간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상이 될 터였다. 편안한 분위기와 평화로운 날들만 계속해서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조금 멍해진 기분으로 생각에 잠겨있던 텐조가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릴 때였다. 근심을 놓을 정도로 안심할 수 있는 일상이라는 건, 텐조에게나 카카시에게나 모래 위에 지은 성 같은 것이었다.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어 손가락으로만 툭 건드려도 무너질 만큼 약하디 약한 것. 한낱 꿈이었던 건 이쪽이다. 텐조가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반나절이면 충분했다.
“부장님, 사장님 비서실에서 전화 왔는데요.”
“…아아. 곧 간다고 전해줘.”
사장실이라는 말에, 아주 잠깐이지만 카카시의 눈썹이 휘어져 내리며 표정이 굳는 것을 텐조는 보았다. 통화를 마친 사야카 대리가 덧붙여 묻는 말에 텐조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 갔다.
“아침에 들르라고 전해 드렸던 거, 아직 안 가셨어요? 다시 전화까지 오는 거 보니 급한 일이신 거 같은데…. 전 점심때 가셔서 같이 식사라도 하고 오신 줄 알았어요.”
“…별일 아닐 거야. 내가 알아서 할게.”
카카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답하고 있었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텐조의 눈엔 전혀 다르게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카카시는 아스마와 마주치는 걸 피하고 있었다. 텐조는 남몰래 씁쓸하게 넘어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그렇고, 사야카 대리. 저번에 부탁한 자료들은 찾아 뒀어?”
“아, 부장님. 그게… 요즘 개발부에서 만든 신제품으로 DB서버 전면 교체한다고 파일도 제대로 없고, 자료실에도 누가 가져가고 없더라고요. 이상하게 우리 부서 것만 거의 없던데요?”
“이상하군. 얼마 전에도 내가 분명 봤는데 말이지….”
카카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자료들을 본 적은 있는데 정작 자신은 최근에 자료실을 간 적도 없었다. 어디서 봤었던가―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떠오른 것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텐―,” // “선ㅡ,”
동시에 서로를 부르다가 말을 멈춰버린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카카시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고 텐조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대화를 듣던 텐조는 카카시가 찾는 자료들이 바로 자신이 열람했던 것들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장님이라 불러야 하는데… 차라리 말문이 막힌 게 다행이라고, 얼른 버릇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카카시가 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부딪혔던 날, 가지고 있던 자료들… 맞지?”
“아, 네. 선― 아니 부장님. 어차피 2주간이라 마케팅 부서에서는 간단한 서류작업 말고는 하는 게 없어서… 그동안 거래하는 회사들이랑 계약상황이나 알아둘까 해서….”
“마침 잘 됐군. 그럼 그거 전부 분석‧정리해. 보고는 타키 과장을 거치면 되고. 기한은 일주일.”
“알겠습니다.”
텐조의 대답에 싱긋 웃어 보인 카카시는 하던 일을 잇기 시작했다. 그 모습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던 텐조 역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부서를 옮겨와 처음 제대로 받은 일거리인 셈이었다. 카카시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본격적인 일이 시작된 만큼 이쪽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카카시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생각하더라도, 확실하게 제 몫을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으로선 회사일이 전부였다. 우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 자료들을 정리하는 것이라면 이미 스스로 좀 해두기도 했고, 어려울 게 없었다. 씁쓸한 마음이 다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입사하자마자 했던 일이 도움이 되고 있으니 어쩐지 의욕이 솟는 텐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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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일을 하면서도 카카시는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청첩장을 건네받았던 날, 그 집에서. 아스마를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다 끝난 일이라고 수백번도 더 생각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다음번엔 무슨 얼굴을 하고 아스마를 봐야 하는지, 그걸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자신은 매번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딱히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피한 것은 아니었다. 아스마도 마찬가지로 사소한 것들은 비서실을 통해서 해결했고, 사실 그게 맞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차피 얼마가지 않아 마주칠 일이 생길 것은 자명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아스마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평소와 다름없이 굴어야 한다고 카카시는 생각했다. 조금도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가라고.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오기였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은 오기. 네가 그런 것처럼, 나도 아무렇지 않다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허나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정작 호출을 받자 최대한 발걸음을 미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하루 동안 얼마나 스스로를 비웃었는지, 카카시는 알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이 30분도 채 남지 않고 나서야, 결국 카카시는 무언가에 떠밀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카카시는 맨 위층의 버튼을 눌렀다. 한 두 번 가는 길도 아니건만 굳이 딱 얼마 전, 마지막으로 갔을 때의 기억이 피어올랐다. 가슴이 묘하게 두근거려왔다. 어떤 표정을 해야 할까,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금은 두렵다. 얼굴이 수척해 보이지는 않을지, 엘리베이터 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러면서 혹시 아스마도 조금은 까칠해져 있지는 않을까… 하며 어리석고 이기적인 기대를 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카카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처 모르고 있었다. 바보처럼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끝난 거라고 수백번을 생각하면서도 전혀 실감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마음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임을. 마주치면 애써 덮어 두었던 모든 것이 생생하게 되살아날까봐 그토록 도망치고 있었음을. 앉아서 자신을 맞는 모습을 그리며 언제나 설레었음을. 짙은 담배향을 맡으면, 그것이 제 몸에까지 뜨겁게 배이던 날들이 떠오를 것임을.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 모든 것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그저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여가던 카카시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 왔음을 알려주라고 비서에게 말해볼까, 고민했지만 당연히 그냥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는지 하던 일에만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포기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카카시가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쩐지 의도한 것보다 더 빠르게 저절로 손잡이가 돌아간다고 느낀 찰나, 피할 새도 없이 문이 툭 열리며 카카시의 몸에 부딪혔다. 카카시는 갑자기 문이 열린 것보다도, 안에서 문을 열고나오던 사람 때문에 얼어붙었다.
“죄송…. 아, 카카시…?”
“……쿠레나이.”
-To be continued
후기.
1. 올릴 때마다 죄송해지는 이야기.........ㅜㅜ 죄송합니다.......ㅜㅜ 아니 이쯤 되면 거의 다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싶어 다음편을 올리는 것보다 그냥 은근슬쩍 앞의 7편을 다 내리는게 낫지 않을까? 하고 고민.......ㄷㄷㄷ
2. 근데 이제와서 써서 올린게 아니라.. 7편 쓴 직후부터 진짜 찔끔찔끔 쓰고 있었다는 사실. 딱히 사건은 없고. 하지만 앞으로를 위해서 해둬야 할 이야기들은 있고. 초반부분은 카카시 나오지도 않고.......... 그래서 드럽게 재미없고 드럽게 안써졌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 Torr..... 어쩐지 글이 더 퇴화하고 있다................. Torr........
3. 어쩐지 1편에서 뿌린 떡밥을 이제서야 회수하고 있는데.. 네, 그랬죠. 텐조와 카카시가 회사에서 처음 마주친게 엘리베이터 앞이었죠. 뭔가 서류를 잔뜩 들고 있던 텐조가 그걸 다 떨어뜨려서 카카시가 주워주기도 하고.. 텐조의 삽질이 시작되고.. 솔직히 말하면 떡밥의 회수따위가 아니라 그냥 어쩌다보니 이용해먹게 된 것이지만.. 그렇다. 1편을 쓸 때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더 무서운 건 그때가 3년 전이라는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이렇습니다. ㅡ,.ㅡ
4. 아 그래서 이제 제발 좀 회식 좀 하자 회식 회식 회식 그노무 회식을 언제부터 말하고 있는데 아직도 안했어!! 일년이 넘었다고!! 아오.. 내가 다 답답터지네!! 그리고 너네 결혼 언제하냐, 날 잡았으면 얼른 해라 아스마 쿠레나이 이런 젠장!! ㅠㅠ
5. 카카시가 너무 카카시같지 않아서 쓰면서 아주 죽겠네요. 가서 정신 차리라고 싸대기를 날려주고 싶어지는 건 왜지. 왤까? 난 어쩌자고 이런 이야기를 생각했을까나? 어쩐지 나타내고 싶었던게 제대로 안됐고, 안되고, 안될 거라서, 자신이 없어지니 한없이 슬퍼지고... 그저 소설만 이상해 보일 뿐이고..흑흑.
6. 그래서 전 원고는 어쩌고 이러고 있을까요? 왜 병신물 쓰다 말고 이런 시리어스를 쓰고 있을까요?